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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6일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했다. 필자는 대통령 발의 개헌안을 준비하는 국민헌법자문특위에서 활동했다.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을 보면 아쉬운 부분들도 많다. 국민헌법자문특위에서 제안했던 내용보다 후퇴한 부분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직접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헌법개정안 국민발안제가 빠졌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회만 헌법개정안을 발의할 수 있는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국민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 헌법개정안 국민발안제는 국회 논의과정에서라도 반드시 도입되어야 한다.  

대통령 발의 개헌안에는 여성의 동등한 참여와 정치적 대표성 확대에 관한 부분이 명시되지 않았다. 교육, 환경 등의 기본권 영역에서도 미흡한 점들이 있다. 지방분권과 대통령 권한 분산의 측면에서도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은 기본권 강화와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 의미있는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또한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함으로써, 30년 만에 최초로 조문화된 개헌안이 공식문서로 발의되었고, 시한을 둔 개헌논의의 장이 열렸다.

그동안 국회에서 개헌논의는 숱하게 반복되었지만,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했다. 심지어 각 정당은 당론조차 내지 않았다. 정치에서 있어서는 안될 무책임한 행태들만 반복되었다. 그런 속에서 개헌의 동력은 거의 사그라들던 상황이었다.

이번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는 꺼져가던 개헌의 불씨를 살린 셈이다. 각 정당들이 당론을 정하도록 강제하는 효과를 이미 거두고 있다. 그러나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무책임하고 격이 떨어지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지난 3월30일 홍준표 대표는 사회주의개헌저지투쟁본부를 구성했다고 한다. 기가 찰 노릇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의 어느 부분이 사회주의라는 것인가?

동일한 노동을 하면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라면, 임금격차가 적은 유럽의 선진국가들은 전부 사회주의라는 것인가? 토지공개념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는 독일이 사회주의 국가인가?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되, 부동산 투기나 지나친 소유집중을 막자는 것은 건전한 자본주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것이 어떻게 ‘사회주의’일 수 있는가? 보수의 격을 떨어뜨리는 이런 주장을 걸러내지 못하면 보수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자유한국당이 해야 할 일은 개헌저지 투쟁본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당론을 내놓는 것이다. 막연한 당론이 아니라 조문화된 형태로 당론을 밝혀야 한다. 그럴 능력도 없는 정당이라면, 정당 문을 닫아야 한다.

대통령과 여당도 ‘정치’를 해야 한다. 아무리 상대방이 말이 안되는 얘기를 하더라도, 붙잡고 얘기해서 일을 되게 하는 것이 ‘정치’다. 사회운동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정치는 문제를 해결할 때에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 개헌에 대한 진정성은 개헌이 되게 하려는 노력으로만 증명될 수 있다.  

개헌이 되게 하려면 여소야대의 의석분포를 현실로 인정하고 문제를 풀어야 한다. 어느 나라든 개헌은 타협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타협하지 않고 개헌을 하겠다는 것은 개헌을 하지 말자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개헌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방법은 야당들을 붙잡고 설득도 하고 타협도 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개헌시기를 늦추자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지방선거가 끝나면 개헌동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지금 개헌동력이 살아난 것은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했기 때문인데, 지방선거 동시 개헌국민투표가 무산되면 또다시 기한 없는 논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2020년 총선이 다가오고, 정당들 간의 이해관계 계산 때문에 개헌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밀실야합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과 여당이든, 야당이든 이번 개헌은 국민개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논의태도를 가져야 한다. 각 정당들이 당론을 내놓으면, 쟁점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에 들어가야 한다. 몇몇이 하는 밀실협상은 곤란하다. 국회에서는 공개토론을 하고, 방송사, 언론사들은 토론내용을 상세하게 보도해야 한다. 정당들끼리 도저히 해소되지 않는 쟁점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토론의 장을 열고 의견을 수렴하는 방법도 있다. 

이번에 대통령 발의 개헌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국민헌법자문특위는 ‘숙의형 시민토론회’를 5차례 열었다. 무작위로 추출된 시민들은 6시간 반 동안 진지하게 개헌의 쟁점들에 대해 토론했고 자신의 의견을 표명했다. 토론이 끝난 후에 만족도 조사를 했을 때, 97% 이상의 시민들은 토론이 만족스러웠다고 답했고, 다시 이런 기회가 있다면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토론에서 시민들은 기본권 강화에 대해 높은 관심을 표명했고, 직접민주제 도입과 지방분권에 찬성했다. 개헌의 최대쟁점인 정부 형태에 관한 토론에서도 진지한 모습을 보였고 상호 경청하는 태도였다. 끝내 정치권이 합의하지 못하는 쟁점에 대해서는 이런 방식을 참고해서 주권자인 시민들의 의견을 들으면 된다.

개헌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들의 공감대는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개헌이 실제로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 정치가 가능성의 예술이라면, 지금 필요한 것은 개헌이 되게 하는 정치이다. 그런 정치를 하는 정치인과 정당을 보고 싶다.

<하승수 |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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