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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공정성이 정치적 화두가 되었다. 장관 한 사람과 그 가족을 둘러싸고 두 달 넘게 이어진 공방을 지켜보면서 결국 유탄의 일부는 대학으로 튈 거라는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교수의 자녀가 다른 교수 논문에 이름을 올리거나 장학금을 받는 일들은 공정성에 대한 사람들의 역린을 자극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따라서 교육 문제를 넘어 정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역시나 대통령의 정시 확대 발언에 이어 교육부는 각 대학에 정시를 얼마나 확대해줄 수 있는지 타진하느라 여념이 없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대학에서 입시를 가장 잘 아는 입학처장들이나 입시전선의 최전방에 있는 교사들은 정시 확대에 부정적이라고 한다. 이들은 공정성이 필요 없다고 보는 것일까.

돌이켜 보면 대통령이 공정성을 강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9년 전인 2010년에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공정사회’를 들고나온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경향신문 칼럼에 이렇게 썼다. “공정성이야말로 굴곡의 현대사를 몸으로 살아낸 한국인들의 가슴 밑바닥에 인두로 지져낸 낙인처럼 찍혀있는 가치”라고. 공정성은 “수많은 한국인들이 겪은 좌절과 부당함과 그래도 실낱같이 붙들고 있는 희망들이 모두 응축되어서 뜨겁게 달구어져 있는 ‘뜨거운 단추(hot button)’ ”라고. 뜨거워서 위험한 공정성이란 단추는 웬만한 각오 없이 누를 수 없다. 뜨거운 단추 다음에 또 누를 수 있는 다른 단추는 없기 때문이다.

학문적으로 공정성은 오랫동안 행동경제학의 주요 연구대상이기도 했다. 행동경제학자로서 노벨상 수상자만 해도 대니얼 카너먼, 로버트 실러, 리처드 세일러까지 세 명이나 되니 이 학문이 들려주는 조언에 귀 기울여볼 가치는 충분하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합리성은 제한되어 있다는 현실로부터 출발해서 합리성의 다양하고도 예측 가능한 왜곡을 밝혀낸다. 환자 600명 중에서 200명을 구할 수 있는 약품 A와 600명이 다 죽을 가능성이 3분의 2인 약품 B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A를 선택한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A나 B나 결과는 똑같다. 하지만 A는 생명을 지키는 방식으로 서술되었고, B는 생명을 잃는 방식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A를 택한다. 손해는 크게 생각하고 이익은 작게 생각하는 ‘손해기피(loss aversion)’ 현상이다. 구직자가 많아졌다고 해서 현재 고용하고 있는 직원의 임금을 삭감하는 것은 대부분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재의 직원이 그만두고 새로 채용하는 직원의 임금을 낮게 책정하는 것은 받아들인다. 특정 자동차 모델이 인기가 있어서 몇 달이나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가격을 100만원 올린다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예전에는 100만원 깎아주던 것을 이제는 깎아주지 않겠다고 하면 받아들인다. 공정성과 관련하여 행동경제학이 주는 교훈을 요약하면 간단하다. 공정성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시중에는 소문이 파다하다. 강남 학부모들은 이미 정시확대에 따른 대책회의를 끝냈다고도 하고, 정시가 확대되면 금수저 학생들에게 더 유리하다고도 하고, 정시확대의 최고 수혜자는 주가가 오른 메가스터디라고도 한다. 입시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시험에 대해 여론조사를 해보면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객관식을 원한다. 주관식은 말 그대로 ‘주관’이 개입할 수 있고, 따라서 금수저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금수저들이 객관식 시험을 준비하기는 얼마나 더 쉬울 것이며 따라서 객관식이 격차를 더 벌릴 수도 있다는 점은 ‘디스카운트’해버린다. 정성평가에서 혹시 입게 될지도 모르는 손해는 최대한 피하려 하고 그것이 가져다줄 수도 있는 이익은 별로 높게 생각하지 않는다. 창의적인 다른 생각의 가능성도 닫히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속한 서울대의 전형 방식은 학종과 정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대학에는 없는 지역균형선발 제도가 있고 도입 당시의 우려와는 달리 지역균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잘 해내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입학에서 졸업까지 꾸준히 성과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교육의 효과 아니던가. 서울대에 정시를 확대하라고 요구하기보다 지역균형을 확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떨까.

공정성은 뜨거운 단추다. 이 뜨거운 단추에 손댈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이 가르쳐주듯 우리의 합리성은 제한돼 있고, 공정성은 왜곡되고 한계가 있는 합리성이 작동하는 대표적 영역이다. 단순히 정시냐 학종이냐, 각각을 원하는 국민들이 몇 퍼센트나 되느냐로 귀결될 문제는 아니다. 비록 한도가 있더라도 우리 합리성의 한계를 최대한 넓히기 위한 숙의를 주도해야 하는 것이 정부의 몫이다. 그래야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되찾는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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