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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정말 같은 재판부에서 나온 판결 맞습니까?” 지난 2월26일, 대법원 1부는 현대차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임을 확정 판결한 반면, KTX 승무원에 대해서는 원심 판결이 잘못됐다며 사건을 다시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둘 다 같은 작업장(컨베이어벨트, KTX 열차)에서 원·하청 노동자들이 섞여서 일하고 있는 경우인데 판단은 엇갈렸다.

현대차의 경우 형식적으로는 하청업체 관리자가 업무 지시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재판부는 이것을 원청인 “피고(현대차)가 결정한 사항을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KTX 승무원의 경우에는 원청(철도공사) 소속 열차팀장이 직접 지시를 내리는데도 “승객 서비스 업무가 위탁협약 내용에 맞추어 제대로 이행되었는지를 확인하고 감수하는 절차라고 이해할 수 있다”니?

이 판결대로라면 원·하청 혼재 사업장에서 사업주가 불법파견을 은폐하기란 식은 죽 먹기가 된다. 실제 필요한 업무는 모조리 외주화해버리고 이들의 업무를 관리하는 일만 정규직으로 쓰면 된다. 도급계약·위탁계약 내용에 ‘업무 매뉴얼’을 만들어 원청이 직접 지시를 내려도 이는 “서비스를 균질적으로 수행하도록 주문하는 취지”라고 핑계를 대면 그만이니 말이다.

알고 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노동시장 구조개혁’이란 이름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노사정위원회 논의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6일 공개된 노사정위 전문가그룹의 의견을 보면,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를 위해 가장 먼저 ‘원·하청 상생협력 등 동반성장’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애초 동반성장 담론은 재벌이 모든 성과를 독점하는 기형적 경제구조를 바꾸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인데, 어느새 비정규직 대책처럼 둔갑해버린 것이다.

“대기업이 하청기업에 투자지원을 확대하고, 이것이 2·3차 협력업체로 흘러가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인상 및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도록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자.” 이것은 전문가그룹이 겉으로 내세운 논리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권의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보면 하청노동자에 대한 산업안전 조치나 직업훈련 등에 원청이 하는 투자 지원을 불법파견 징표에서 제외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 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된 결과가 바로 KTX 승무원에 대한 판결이다. 즉,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재벌 대기업과 거대 공기업들은 위기 탈출을 위해 미친 듯이 외주화·하청화를 단행하며 비용 절감에 나섰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하청노동자들의 저임금과 고용불안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외주화로 인해 제품과 서비스의 품질이 떨어져선 안된다. 그래서 하청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업무감독과 인력관리만은 대기업이 직접 챙기려 하는데, 이게 불법파견과 위장도급 논란을 불러온 것이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원들이 26일 근로자 지위 확인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승소한 뒤 대법정을 나와 밝은 표정으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재벌 대기업들 애로사항이라면 무조건 해결해주는 박근혜 정권이 내놓은 대책이 바로 이거다. 원청이 하청노동자를 직접 관리하고 교육과 기술훈련시켜주는 것은 상생협력으로 봐야지 범죄시해서는 안된다는 것. 아니, 그렇게 훈련시켜 직접 부려먹을 거면 고용도 원청이 직접 하는 게 상식 아닌가? 그도 아니라면 하청노동자의 교섭 요구에 원청이 응하도록 노조법 2조를 개정하는 게 순리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나온 판결문에는 섬뜩한 내용도 들어 있다. “화재 등의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KTX 여승무원도 열차팀장의 지시를 받아 화재진압 및 승객대피 등의 활동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지만, 이는 이례적인 상황에서 응당 필요한 조치에 불과하고 KTX 여승무원의 고유 업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았다.”

1000명 넘는 승객을 태운 KTX 열차에 비상사태 발생 시 승객에 대한 안전조치를 고유 업무로 가진 사람이 열차팀장 한 명이면 된다는 논리이다. 한 달 뒤로 다가온 세월호 참사 1주기, 우리 사회는 대체 뭘 배운 걸까.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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