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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쓰고 읽는 기쁨

opinionX 2015. 3. 16. 21:00

우리는 일체의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이 삶에 어떤 돌파구를 열어놓을 것 같지 않다. 백일이 다 되도록 굴뚝 위에 올라가 있고 아스팔트 바닥을 삼보일배로 기더라도, 또는 하루에 열 몇 시간씩을 노동하며 아등바등거리더라도 뭔가 우리 삶에 가능해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러니 차라리 외면하는 일이 많아진다. 그러나 이 외면은 나만 살아남겠다는 외면이라기보다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다시 절망을 마주 대하고 좌절을 맛보지 않겠다는 외면에 가깝다.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절망 속에서는 그 얼굴을 대하는 것이 위로는커녕 가장 끔찍한 고통이 된다. 위로가 불가능하다는 것만을 악마처럼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로와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외면하는 것을 통해서 삶은 덜 괴로울 수는 있어도 기쁠 수는 없다. 아마 우리가 처한 지금 상황이 가장 처참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기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덜 괴롭기 위해 사는 것 말이다. 그렇게 덜 괴롭게 살기 때문에 순간순간의 우울과 고통, 슬픔은 진실을 대면했을 때보다 덜하지만 삶 자체는 더 비참해진다.

나와 함께 공부를 하고 있는 한 학생의 삶도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 그랬다. 대학에 들어온 지 1년이 겨우 넘은 시간에서 맞닥뜨린 세월호 사건은 이 학생에게도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 질문을 던지게 했다. 무엇보다 유가족들의 슬픔은 과연 무뎌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슬픔은 시간이 지난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결국 그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즈음 생각난 것이 한 수업에서 들은 “인간은 인간을 위로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 학생이 고통스럽게 받아들인 것처럼 고통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 짐을 혼자서 지고 가야 한다. 이 시대에 중요한 능력이 공감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지만 사실 공감은 불가능한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그 끝없는 슬픔과 고통을 보며 이 학생도 끝없는 절망과 슬픔을 느꼈지만 그 고통은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짐일 뿐이다. 그래서 이 학생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소망하고 소망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눈물 흘리는 실종자 가족 (출처 : 경향DB)


그런데 사람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닫힌 상태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 생각하던 이 학생에게 한 소설이 그 문을 열어놓는다. 박민규의 소설 <아침의 문>이다. 자살하려던 한 남자가 건너편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아이를 낳고 있는 장면과 마주치게 된다. “이곳을 나가려던 자와 그곳을 나오려던 자는 그렇게 대면”한다. 자살을 시도하던 남성은 건너편 건물로 올라가 버려진 아기를 안고 울지 말라고 달랜다. 이 학생은 이 소설을 읽고 ‘위로’를 느꼈다고 말했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그 ‘위로’를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위로가 나타났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글의 무가치함에 대해 허무해하던 내가 위로를 느꼈다. 그의 이야기는 말과 글의 가능성을 다시 생각하고 이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기쁜 소식’이었다. 또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이 이야기를 같이 읽고 토론하면서 공부의 기쁨이란 바로 이런 가능성의 발견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세월호의 고통 한가운데에서 저 학생이 한 질문, 즉 고통이 끝나지 않은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준다. 그것은 일본의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가 말한 것처럼 여전히 읽고 말하고 침묵하고 쓰면서 세계를 대면하는 일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를 대면하는 글을 읽고 쓰고 침묵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 불가능한 것을 대면함으로써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쁨이 단지 덜 괴로운 것에 머무는 데서 우리 삶을 구원할 것이다.


엄기호 | 문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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