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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24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저지른 반민주행위들에 대해 사과했다. 명시적으로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적 가치가 훼손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시인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조차도 가해자 측의 한 중심축이던 박 후보가 시인한 것은 처음이다. 그는 1975년부터 1979년 10월까지 퍼스트 레이디로서 여성구국봉사단 총재 활동을 벌이는 등 유신체제의 중심에 있었다. 이어 박 후보는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후보의 이날 사과 연설은 몇 가지 새로운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엄중한 역사 문제를 선거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발언한 점이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는 후보가 무슨 말인들 못하겠냐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독재권력에 의해 자행된 비인간적 고문과 인권탄압이 득표전략상의 사과발언으로 청산될 수는 없다. 진심이냐, 술책이냐를 두고 상당한 논란이 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과거사 사과기자회견하는 박근혜후보 (경향신문DB)


둘째, 최근 여러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하락세가 뚜렷하니까 고육책으로 사과발언을 기획했다는 분석이 많다. 박 후보의 위기는 측근 비리가 연달아 터진 탓도 있지만 지속적이고 심각한 것은 역사관 문제에서 비롯됐다. “5·16은 구국의 혁명, 유신도 역사 평가에 맡겨야”라거나 인혁당 피해자에 대해 “같은 대법원이 다른 두 개의 판결을 내놓았다”는 발언이 그것이다. 이는 독재자의 딸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역사관이기 때문에 문제다. 정수장학회도 아버지가 강압적으로 빼앗은 것과 별개로 박 후보가 10년간 이사장을 맡아 국회의원을 하면서도 평균 2억원 안팎의 연봉을 받아갔다. 이는 그 자신의 공직자 윤리의식에 흠결이 아닐 수 없다. 


셋째, 박 후보의 사과발언이 추석을 며칠 앞둔 시점에 나온 것 또한 선거전략상 비상대책이라는 지적에 무게를 더해 주고 있다. 민족 명절에 인구대이동을 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 잔칫상머리의 민심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이번 사과로 그동안 입장이 분명치 않던 중간지대의 부동 유권자 중 상당수가 박 후보 쪽에 흡인될 수 있지만 그것이 사과의 진정성 평가에는 마이너스라는 얘기다.


넷째, 박 후보는 5·16과 유신이 헌정사를 유린한 불법적 쿠데타였다는 것이 아니라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우회 어법을 썼다. 이 점에서 학계와 시민단체들의 비판을 부를 것이다.


다섯째, 과거사 청산을 위해 ‘국민대통합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지난달 후보수락 연설에서 이미 ‘100% 대한민국’과 함께 ‘국민대통합 시대’를 언급했기 때문에 새로운 제안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 시대의 ‘국민총화’나 ‘총체적 단결’을 연상시키는 전체주의적 용어의 냄새도 묻어 있다. 


구시대적 국민통합보다는 ‘헌정사평가위원회’나 ‘과거사청산위원회’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개발독재가 경제성장에 끼친 영향은 아직도 논쟁거리다. 그러나 산업화를 위한 국민 동원과 사회 조직화가 아니라 1인독재를 위한 반민주 악행에 대한 규탄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증오와 분열을 버리자고 하려면 그 원인을 제대로 규명한 뒤 책임자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이 전제돼야 한다.


2006년 노무현 정부는 제주도 4·3사건에 대해 그 조사위원회의 활동결과를 바탕으로 국가권력이 잘못했다고 공식 사과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 정권이 저지른 비행에 대해서 후대의 서독 민주정부가 공식 사과했다. 서독은 더 나아가 각 정당들이 부설 정치재단을 만들어 과거사 반성과 민주시민 교육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나는 2013년 새 정부가 유신독재 아래서 저질러진 모든 체제폭력에 대해 공식 사과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후보들이 이것을 미리 공약하고 선거과정에서 국민 합의를 이루어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실천에 옮길 수 있다. 그런 국민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더 이상의 소모적인 과거사 논쟁과 분열이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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