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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 비정규노조연대회의정책위원

“망국적 한국병을 치유하고 신한국을 창조하자!” 1995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김영삼 문민정부는 ‘민주자유당’의 이름을 ‘신한국당’으로 개명한다. 당명만 바꾼 게 아니다. 구 민정당, 공화당계 인사를 몰아내고 이재오·김문수 등 민중운동, 노동운동 출신 인사들과 홍준표·맹형규 등 당시 스타급 신인들을 영입한다.

다음해 치러진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42%에 달하는 현역 교체율을 보인 공천을 통해 139석을 얻어 제1당 자리를 수성하고, 과반 의석도 확보한다. 총선 직후 김영삼 대통령은 “투쟁과 분배 우선에서 벗어나 경제 발전과 함께 가는 합리적 생산적 노동운동”을 주문하며 이른바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한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 12월26일 새벽 6시, 신한국당 국회의원들을 몰래 동원해 날치기로 노동법 개악안을 통과시켜 버린다. 이날 통과된 노동법은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도입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 부정 △파업기간 대체근로 허용 △무노동 무임금 등 노동기본권을 억압하는 온갖 독소조항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한 민주노총 조합원들 I 출처:경향DB

바로 그때, 퇴행하는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려 세울 움직임이 시작된다. 탄생한 지 1년 남짓 된 민주노총이 국회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며 총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오전 8시 총파업 선언이 내려지자마자 14만5000여명이 파업에 돌입한 것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파업에 참여한 연인원은 100만여명에 달했다. 총파업은 다음해 1월18일까지 연인원 200만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낸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에 치명상을 안겨주었다. 당명 개정도, 개혁 신진인사 영입도, 국회 과반 의석도 성난 총파업 앞에서 모두 ‘자본가를 위한 정권’이라는 맨얼굴을 가리기 위한 치장일 뿐이었다. 이후 문민정부는 한보철강 비리, 김현철사태를 겪으며 식물정권으로 전락해간다. 김영삼 정권을 하야 직전으로까지 몰고 갔던 총파업은 향후 노동법 개정을 여야 협상으로 넘김으로써 역사를 다른 길로 인도한다. 김영삼·김대중 세력의 협상 결과는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2년 유예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허용 5년 유예였을 뿐이다.

협상의 한 축이었던 김대중 세력은 그해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뤄내지만, 대통령 취임도 하기 전에 노사정 협상에서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즉각 실시를 밀어붙였다.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한 후과로 근로자파견제까지 도입돼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비정규직 규모는 정규직을 넘어설 정도로 확산되고 말았다.

“노동자 국회의원 한 명만 있었더라도….” 운명을 국회 협상에 맡겨버린 과오에 대한 노동자들의 탄식 속에 노동자 정당 건설이 시작된다. 7년이 지난 2004년 총선에서 무려 10명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을, 다시 8년이 지난 이번 총선에서는 통합진보당이 13석을 얻었지만, 지난 15년간 노동법 개정은커녕 법 개악 한번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노동자 국회의원 한 명도 없었던 1996~97년의 총파업을, 역사는 1987년 이후 가장 위력적인 노동자 투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흥이 나야 말이죠. 밀린 숙제 하러 투표장에 떠밀려가는 기분이랄까?”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죽어간 수많은 노동열사들을 기리며 노동자들은 ‘살인정권 퇴진’을 외쳤다. 그런데 이제 그들과 손잡고 ‘묻지마 야권연대’로 정권교체를 하자는 말에, 열사들을 기억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이 느꼈을 곤혹스러움이란….

민주노총이 올해 다시 총파업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노동의 정치’는 본래 총파업에서 탄생됐고 ‘정권교체’ 이상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1996~97년 총파업이 막아내지 못한 정리해고, 그로 인해 파생된 비정규직 양산 문제를 해결하는 것.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총파업이야말로 미완의 총파업을 완성하고 잊혀진 ‘노동의 정치’를 되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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