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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 정치부장


152(새누리당) 대 127(민주통합당). 158(보수) 대 142(민주·진보).


좁혀도 넓혀도 뭔가 홀린 듯한 스코어였다. 11일 밤부터 신문사에 걸려온 전화만 봐도 진 쪽의 패닉은 꽤 오래갈 듯하다. 하늘이 준 진보 과반의 기회를 갖다 바쳤고, 별렀던 불법사찰·종편 청문회가 가뭇해졌고, 복지·재벌개혁 이정표도 멀어진 듯한 항변이었다. 원주의 40대 남자는 “다 죽으라고 전해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한명숙·김용민 욕만 퍼붓던 부산 사투리가 들렸고, 말없이 한숨만 쉬는 여자도 있었다. 야권 지지층의 공허감이 파도처럼 실려 왔다. 2010년 6·2 지방선거, 가까이는 6개월 전 서울시장 선거부터 오매불망하던 심판의 기세가 꺾인 울분이리라.


이긴 쪽도 혼란스러워 했다. 152는 짐작도 못했던 숫자였다. MB정부 끝물에 받아든 과반 1당은 힘과 독을 다 품고 있다. “정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셨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는 박근혜 비대위원장 말에 앞뒤가 녹아 있다. 이젠 MB정부에 떠넘길 수 없고, 국정 현안을 답해야 할 ‘박근혜 대세론’이 시작된 것이다. 4·11 총선은 그렇게 대한민국 정치 풍향을 180도 돌리는 집권 보수당의 9회말 역전 홈런으로 끝났다.



18대 총선과 19대 총선 세대별 투표율 비교 (경향신문DB)



 그 많던 화난 새들은 어디 갔을까. 선거 뒤 끝에 떠오른 단어는 ‘앵그리 버드(Angry Bird)’였다. 홍준표가 공식선거운동 첫날 ‘홍그리버드’라고 분장했을 때 웃고 말았지만, 선거 이틀 전 안철수가 “화나셨어요? 투표하세요!”라며 던진 배불뚝이 새 인형은 정치적이었다. 선거 전날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스마트폰을 켜고 게임을 해봤다. 나무집이나 얼음, 땅 밑에 숨어 있는 돼지들을 새들이 날아가서 깨는 일은 손에 익지 않았지만 창밖의 세상을 잠시 잊게 했다. 안철수가 4월에 대학 특강에서 말한 ‘진영 논리만 횡행하는 구체제’ ‘지역 패권’ ‘일자리 없는 대기업 중심 경제체제’는 돼지들이었다. 날아가는 새처럼 내 투표권이 이리 많고, 1000표짜리 폭탄 투표권도 있으면 좋겠다는 착각을 할 즈음 택시가 집 앞에 섰다. 그리고 24시간도 안돼 나는 저녁 방송사 출구조사와도 반대로 가는 개표 결과를 신문에 담느라 밤새우는 앵그리 버드가 됐다.


두 시간 자고 다시 출근해서 든 생각, 거리에서 들리던 분노의 새소리는 환청이었을까. 사람들은 나경원의 ‘1억 피부과’ 공방이 서울시장 선거를 가르고, 김용민 막말이 총선 판을 엎었다고 말했다. 무시할 수 없는 면이다. 정치인들이 링 위에 올라 유권자의 맘을 잡는 선거는 게임의 속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김용민만으로 분노의 대전환을, 서울과 지역의 표 엇갈림을 결론지을 수 없었다. 그 답은 시간을 늦추기로 했다.


뒤에 공개된 방송사 출구조사 자료를 보면서 눈이 멎었다. 20대 투표율(45.0%)이 30대 투표율(41.8%)을 앞섰다. 변화를 낳은 것은 서울의 20대 투표율 64.1%였다. 경기·인천의 20대 투표율은 평균을 깎아먹는 38.5%, 34.1%였다. 그럼 뭐야! 야당이 압승한 서울에서 20대 앵그리 버드는 살아 있었다. 왜 그랬을까. 선뜻 떠오른 것은 박원순이었다. 서울시립대 반값 등록금을 1호 정책으로 서명했고, 서울시 비정규직 1054명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킨 서울의 변화를 20대는 봤다. 정치가 못하는 게 아니라 안했다는 것을 본 것이다. 체험의 정치다. 트위터 이용자의 70%가 수도권에 살고 평균 연령이 27~28세인 점을 봐도 서울 20대의 동질적 소통을 엿보게 한다.


지난해 9월 시작된 안철수 현상의 축도 그들이었다. 내 삶의 문제에 답을 주지 않는 정치를 향한 분노와 갈증, 촛불집회-용산참사-희망버스에서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안철수 현상의 본질이었다. 정기국회를 지나고 총선을 치러도 변한 것은 없다. 등록금 빚과 이력서 쓰기에 지친 20대, 보육과 집값에 한숨짓는 30대, 사교육비와 노후가 불안한 40·50대의 고통은 분노였다. 국가의 역할을 묻는 소통의 물꼬가 안철수였고, 정치적 첫 작품이 박원순이었다.


서울과 전국의 20·30대 투표율을 보면 야권이 한쪽 날개로 선거를 치렀다고 역산된다. 2010년 지방선거 때의 ‘무상급식’,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 때의 ‘반값 등록금’처럼 피부에 닿는 새로운 정책구호 하나 없었다. 믿거나 말거나식 흠집내기에 박원순이 맞선 것은 애들 밥먹는 것 갖고 시비걸지 말라는 말이었다. 심판 뒤의 변화가 박원순이었다. 그후 보수의 좌클릭과 말 공세에 뭐가 다른지 보여주지 못한 한명숙 시대였고, 무엇을 하겠다보다 심판하기 위해 뭉쳤다고 일관한 야권연대였다.


정치는 분기점을 맞는다. 넉 달 전 비대위를 출범시킨 새누리당은 정상체제로, 민주당은 비상체제로 간다. 총선 때 보수·영남·재벌·조중동이 재구축한 박근혜 대세론은 수도권과 젊은층의 벽에 부딪혀 있다. 막다른 골목에 선 야당은 가려는 길을 응축한 선택지 하나를 내놓아야 한다. 비정규직(일자리), 세금, 복지(경제민주화), 평화의 답을 찾는 자가 마지막 승자가 될 것이다. 여권의 숙제, 야권의 희망은 서울의 20대 앵그리 버드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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