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현 | 동화작가
‘화륜거의 소리는 우뢰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 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달리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1899년 9월19일자 ‘독립신문’ 기사의 한 대목이다.
바로 그 전날인 9월18일,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기차가 달렸다.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총 33.2㎞ 구간으로 경인선이 개통한 것이다. 평균속도는 시속 20~30㎞로 자전거 속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 기차는, 불을 뿜으며 달리는 수레라 부를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열차 타는 재미에 빠져 재산을 탕진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 만큼 요금이 비쌌다. 보통 사람들은 엄두를 낼 수도 없었고, 신분에 따라서 객차에 차등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서울역(1901년), 경향신문DB
더 큰 문제는, 기차의 개통이 일제 식민지배의 신호탄이라는 사실이었다. 일제는 경인선을 필두로 교통망을 넓혀가며 조선의 물자를 본국으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근대화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조선인의 노동을 착취하여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차의 개통은 하나의 ‘진보’였다. 반나절 거리를 한 시간 반 만에 주파한다는 것은, 단지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움직이는 물체의 속도를 높인다는 것은 곧 거리를 좁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리적 공간의 제약에서 그만큼 자유로워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새벽의 경성역을 상상해 본다. 입성은 허름하지만 눈빛이 형형한 젊은이가 새벽 안개를 헤치며 역사로 들어선다. 그는 중절모를 눌러쓰고 옷깃을 세운 채 주변을 경계하듯 둘러보다가 출발의 기적소리가 높이 울리고서야 북행 열차에 훌쩍 몸을 싣는다. 일자리를 찾아 원산이나 신의주로 가려는 건지도 모른다. 국경을 넘어 독립군을 찾아가려는 건지도, 어쩌면 대륙의 반대편 끝까지 가볼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랬다. 열차에 오르면 세상 저편까지 달릴 수 있었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누구나 그럴 수도 있었다. 누구나 그런 꿈을 꿀 수 있었다. 수틀리면 이대로 기차 타고 확 떠나버린다? ‘하늘을 나는 새도 따라오지 못하리라’고 큰소리를 칠 만했다.
새처럼 자유롭게,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압록강을 성큼 건너, 대륙의 지평선을 넘어. 본디 한반도인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역사 이전의 시대부터 한반도인들은 대륙을 마음껏 넘나들었다. 고대 중앙아시아 교역의 중심지였던 사마르칸트의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에는 고구려 혹은 신라의 사신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모습이 남아 있다. 그들은 한반도에서 출발해 대륙의 반대편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에는 시속 300㎞에 달하는 고속열차가 달리고 있다. 그러나 열차가 달릴 수 있는 구간은 고작해야 한반도의 허리까지. 제아무리 물리적 속도를 높인들, 하늘을 나는 새는커녕 굼벵이보다 못한 속도다. 우리는 시속 300㎞의 속도로 한반도 남단에 발이 묶여 버렸다.
지난 6일, 북한군 한 사람이 상관 둘을 총으로 쏘고 비무장지대를 넘어 남쪽으로 귀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탕 탕 탕 탕 탕 탕! 여섯 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한다.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고작 10㎞에 불과한 비무장지대를 넘기 위해 두 명의 목숨을 앗아야 했다.
물리적 제약만 있는 게 아니다. 트위터상의 리트윗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에 걸려 구속되기도 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국가보안법 구속자가 급격히 늘어나 2010년에는 130명에 달했다. 이전 정권의 세 배에 달하는 수치다. 그런데도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은 50%에 육박한다. 무서운 다크호스 안철수 후보는 아직 입장을 밝히지도 않았다. 그나마 문재인 후보는 원칙적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론자라는데, 미안하지만 못 믿겠다. 한 번 속은 기억이 있다. 지금 한반도는 얼마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 걸까. 시속 20㎞였던 최초의 열차로부터 112년, 한반도의 속도는 마이너스다.
'정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때 이른 야권후보의 단일화 논의 경계한다 (1) | 2012.10.08 |
---|---|
[사설]“내곡동 비리 덮었다” 자인한 검찰 (0) | 2012.10.08 |
[사설]세 후보, ‘이벤트 정치’ 그만 접고 집권 구상 내놔야 (0) | 2012.10.04 |
[기자메모]골프세 깎아주고 무상보육 없애려는 정부 (0) | 2012.10.03 |
[사설]문재인 후보가 진정 ‘노무현’을 넘으려면 (0) | 2012.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