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엄주웅 | 호루라기재단 상임이사
혹시나 했더니 역시였다. 무상급식이 화두가 되었던 작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만 해도 이번 19대 총선은 복지와 경제민주화 등 정책 이슈를 중심으로 치러질 것으로 전망됐다. 그런데 투표일을 며칠 앞둔 지금까지 정책선거는 실종돼 가는 느낌이다. 정당·후보자들의 상호비방과 네거티브 공세에 색깔론까지 더해 낯익은 살풍경이 또 벌어지고 있다.
때마다 입버릇처럼 공정보도를 다짐하는 언론들의 행태도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사실 그들에게는 편리한 알리바이가 있다. 경기 내용이 저질인데 중계하고 해설하는 입장이니 어쩌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선거라는 ‘경기의 중계’가 결코 언론의 역할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그들 언론의 눈에는 정당과 후보만 띌 뿐이지 선거의 진정한 주인인 유권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쟁점이든 대립하는 후보나 정당의 주장을 동등하게 따옴표 속에 넣어 보도하고는 공정을 다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셈이다. 민간인 불법사찰과 증거인멸 사건을 총선 이슈로 부각시켜 ‘정쟁 프레임’으로 보도한 정파적 언론들이 바로 그렇다.
경향은 민간인 불법사찰 관련 소식을 검증된 사실 중심으로 보도해 이 같은 프레임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3월31일 KBS 새노조의 문건 분류 실수를 꼬투리 잡아, 사찰의 80%는 전 정권에서 행한 것이라며 청와대가 ‘물타기’를 시도하자, 경향은 뉴스분석을 통해 청와대 주장의 허구를 밝혔다(4월2일). 이어 새누리당과 박근혜 위원장이 자신들도 전·현 정권의 사찰 피해자라고 주장하자, 그 전신인 한나라당이 불법사찰을 비호하고 사찰 피해자를 공격했던 사실을 환기시켰다(3일, 1면 ‘새누리 의원들이 행동대원 역할’). 사설로는 불법사찰 논란을 ‘선거철 혼란’으로 인식하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고(4일) 즉각적인 해명과 진실 규명을 요구했다(2일). 선거운동 보도 이외에는 양쪽의 대립되는 주장을 병치하여 제목을 달지 않은 것도 ‘진실 앞에 중립은 없다’는 대원칙을 실천한 것이라고 본다.
경기 일산동구 미관광장에서 시민들이 한 총선 후보자의 유세를 지켜보고 있다. (경향신문DB)
이번 총선에서 경향은 한 번도 여론조사를 실시하지 않고, 다른 조사의 결과도 별로 인용하지 않았다. 신뢰도 낮은 수치로 표심을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5일, 6면). 나아가 어느 당이 몇 석을 차지할까 하는 판세 분석도 각 당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인용 보도한 데 그쳤다(3월30일, “여야의 엄살작전, 속내는 지지층 결집”). 종래 선거보도의 고질적 병폐인 이른바 ‘경마식 보도’를 철저히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경향은 정책 중심의 보도에 공을 들였다. 4개 주요 정당의 총선공약을 경실련과 함께 분야별로 검증한 기획기사(4월5~7일)가 돋보였다. 개혁성, 적합성, 실현가능성의 세 가지 기준으로 나눠 전문가들이 5점 척도로 점수를 매겼는데, 실은 이 긴 기사가 과연 얼마나 읽힐지, 유권자의 선택에는 얼마나 도움이 될지 궁금했다. 검증 결과 공약의 실현가능성과 개혁성은 대부분 트레이드 오프(trade-off)를 이뤘는데, 유권자는 이 중 무엇을 보고 정당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4월7일에는 지난번 총선과 비교해 여야 정당의 공약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었는데(5면, 새누리당 -0.1에서 0.47로, 민주 0.46에서 0.75로 ‘진보 쪽 이동’), 이른바 ‘좌클릭’이라 하여 이미 알려진 내용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유권자의 선택을 실질적으로 도우려면 더 구체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전문가의 평가 못지않게 일반 시민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보도가 아쉬웠다. 짜증나는 정쟁의 와중에서도 좀 더 나은 삶을 바라며 권리 행사에 임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끌어내었으면 했다.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활상의 절실한 문제를 통해 공약과 정책을 짚어 보았다면, 비슷한 처지의 다른 이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또한 평가의 주요한 잣대인 실현가능성이나 개혁성도 공약 자체만을 놓고 볼 게 아니라, 해당 정당의 주요 면면과 행태를 함께 고려해야 더욱더 피부에 와 닿을 것 같다.
경향은 그간 주요 사안에서 ‘시민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든 정치적 자원이 제도정치로 일시에 흡인되는 총선거라는 속성 때문인지 시민정치적 요소를 그리 발현시키지 못했다. 공천과정에서의 잡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참여 경선은 개선되고 확대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었어야 하고, 각 지역이나 직능 단위에서 진행되는 공약 검증 시민운동(예를 들면, 4월4일자 16면 “뿔난 노인단체, 정치인 출입금지” 같은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발굴·소개했으면 좋았겠다. 마찬가지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자살 등 선거운동 기간 중 발생한 주요 사건도 총선과 연관해 해결책을 함께 제시해 주었으면 했다.
그나저나 얼마 남지 않았다. 유권자의 투표 참여를 유인하는 보도에 전력을 다하길 바란다. 높은 투표율이야말로 누가 승리하느냐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향마당]누구를 국회의원으로 뽑을 것인가 (0) | 2012.04.09 |
---|---|
민주주의가 생존의 문제인 이유 (0) | 2012.04.09 |
4·11 총선, 무엇을 심판해야 하나 (0) | 2012.04.08 |
방송장악·파업 악순환 고리 끊으려면 (0) | 2012.04.08 |
추문의 선거판, 파문을 일으키자 (0) | 2012.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