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 사회가 전쟁 책임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을 두고 100년 넘게 갈등했다고. 그런 중에 놀라운 건(?) 노예해방가로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링컨 대통령의 동상이 미국의 남부 지역을 통틀어 처음 만들어진 것이 2003년이라는 것이다. 리치먼드에 있는 그것은 워싱턴에 있는 것과 달리 그 크기도 실물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링컨에 대한 미국 남부의 평가는 그 동상의 크기만큼이나 인색한 편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대비할 일은 아니지만, 한국은 전쟁이 발발한 지 ‘겨우 60년’을 갓 지났으니, 앞으로 적어도 40년은 더 싸워야 할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미국의 경험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둘러싸고 생성된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특히나 노예해방과 같은 ‘보편적 인권’ 문제가 걸린 사건이었는데도 시비가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국민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전태일 재단 방문과 동상 앞 헌화를 ‘시도’했다. 그의 행보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의 방문 계획 소식을 접한 전태일 재단의 한 관계자는 “오늘 태풍이 서울까지 도착한다는데…, 제가 있는 재단은 볼라벤보다 더 큰 태풍을 예고하고 있습니다”라고 썼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파격이 통합의 물꼬를 트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서울 종로 청계천6가 전태일 동상을 방문한 박근혜 대선 후보 (출처: 경향DB)
그의 행보에 대한 반응을 볼 때 그러하다. ‘진정성이 없는 오만함’ ‘정치적 쇼’라는 비판이 가해졌다. 통합의 상대측과의 사전 소통과 공감이 선행되지 않은 일방적 행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모욕감을 느낀다는 말도 들린다. 그 재단관계자는 앞선 글에 이어 “그 태풍이 할퀴고 가는 상처가 꽤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참 답답하네요”라고 썼다. 심지어 같은 당 소속인 이재오 의원은 “손 내밀면 통합된다는 생각은 독재적 발상”이라며 맹공을 퍼붓기까지 했다.
그런 파격 행보가 의미하는 것이 ‘통합의 시작’인지, ‘통합의 종결’인지 잘 모르겠다. 후자라면 따따부따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통합의 시작이라면 박근혜 후보가 유념할 것이 있다. 미국의 경험에서처럼 통합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고수하는 한 그렇다. 노예해방이라는 ‘가치’가 아닌 반공이라는 ‘적대감’을 대의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키자마자 좌익분자라는 이유로 백수십명을 일거에 처형했던 ‘야만’을 옹호하면서 통합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책브레인’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버지라는 걸 떨쳐버리고 전직 대통령으로 객관적 평가를 하면 좋겠다”고 했다. 어쩌면 이것이 통합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리라. 하지만 그것에도 전제가 있다. 객관적 평가라는 미명하에 ‘경제성장이라는 업적은 인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권을 경제적 부와 맞바꿀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언에는 ‘누군가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관점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정의론>의 철학자 존 롤스가 밝힌 바처럼 누군가의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특히 약자의 희생, 그것도 부당한 이유로 생명마저 내놓아야 하는 희생일 경우 더욱 그렇다. 약자의 부당한 희생의 불가피성을 수용하는 공동체는 발전은커녕, 오래 지속될 수도 없다. 40년 더 한국전쟁의 책임을 둘러싼 공방을 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개명천지’에 그런 공동체에 애정을 갖고 계속 살아갈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권과 경제성장 사이에 딜레마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딜레마는 정치지도자가 겪어야 할 선택의 고뇌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일 뿐, ‘국민행복’을 기치로 내건 정치지도자가 지향하는 가치관으로 표방될 수 없다. 박근혜 후보가 진정 통합을 하려면 이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정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여준칼럼]우려되는 ‘국제정치의 국내정치화’ (0) | 2012.09.03 |
---|---|
[사설]공적자금 투입하는 하우스 푸어 대책은 안된다 (0) | 2012.09.03 |
[사설]자강·참여·민생이 민주당 위기 탈출의 길이다 (0) | 2012.09.02 |
[사설]긴급조치 9호 사건 무죄 판결이 말하는 것 (0) | 2012.08.31 |
[사설]헌법재판관 9명 중 공안검사 출신이 2명이라니 (0) | 2012.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