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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 정책으로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친(親)노동 대통령으로 분류된다.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4선 대통령이었던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의 편에 섰다. 대기업의 독점을 용납하지 않았고, 금융시장 규제를 강화했다. 보수세력과 자본가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될 만했다. 루스벨트는 1933년 첫 취임 연설에서 밝힌 대로 “돈과 이윤보다는 사회적 가치에 헌신해야 경제 재건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이른바 ‘와그너법(Wagner Act)’을 제정해 노조결성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보장했다. 노동시간을 규제했고, 아동노동을 금지했다. 뉴질랜드가 1894년 처음 도입한 최저임금제를 미국 노동시장에 착근(着根)시킨 것도 루스벨트였다. 그는 1938년 시간당 25센트의 최저임금제를 도입하면서 “노동자들이 생존할 수 없도록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기업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최저임금제 도입으로 소득 하한선을 설정한 루스벨트는 상한선도 그어야 빈부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미국은 상위 1%의 소득이 국민 총소득의 20%를 웃돌 정도로 소득불평등이 극심했다. 루스벨트는 소득계층 간 격차를 줄이는 ‘대압착(Great Compression)’의 일환으로 1942년 소득상한제 도입을 추진했다. 연소득 2만5000달러를 상한선으로 설정하고, 초과분은 100%의 세율로 과세하는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정의당 심상정 대선후보가 19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종홀에서 열린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대선 공약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소득상한제는 시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지만 의회에서는 격렬한 논쟁을 불렀다. 의회는 공방을 거듭한 끝에 1944년 20만달러가 넘는 소득에 대한 과세율을 94%로 높이는 절충안을 통과시켰다. 그 이후 소득분배는 눈에 띄게 개선됐고, 세수도 늘어났다. 루스벨트가 빈부격차 없는 세상을 꿈꿨다는 것은 1937년 두 번째 취임 연설문에 드러나 있다. “가진 자들의 부유함에 많은 것을 더하는 것보다 빈곤층을 넉넉하게 해줘야 미국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는 루스벨트처럼 ‘노동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그는 선거 구호로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내걸었다. 시대정신으로는 ‘불평등 해소’를 꼽았다. 노동 존중의 정신이 헌법에서부터 구현되도록 하는 ‘노동 헌법 개정’ 공약도 내놨다. 헌법 전문에 노동과 평등의 가치를 담고, 헌법 조문에 있는 ‘근로’라는 용어를 ‘노동’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그의 이런 비전 제시는 주목할 만하다. 노동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해소할 수 없는 현실에서 오직 심 후보만이 노동 의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 후보는 ‘살찐 고양이법’으로 불리는 ‘최고임금법’ 제정 의지가 강하다. 대선 주요 공약으로도 제시했다. 그는 지난해 6월 최고임금법을 발의하면서 “헌정사에서 처음 제출되는 기념비적 법안”이라고 의미 부여를 했다. 최고임금제는 민간기업 임직원 보수를 최저임금의 30배, 공공부문은 10배로 제한하는 내용이다. 심 후보는 최고임금제가 도입돼야 소득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최저임금이란 바닥은 높이고, 최고임금이란 천장은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루스벨트가 추진했던 ‘대압착’과 같은 개념이다.

하지만 최고임금제에 대한 거부감도 만만찮다. 재계는 임금 상한선을 법으로 정하는 것은 시장경제 논리에 어긋난다는 반론을 편다. 고액 연봉자에 대한 질투를 밑거름으로 삼는 반(反)기업적 발상이란 시각도 있다. 하지만 소득불평등 해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절박한 과제다.

지난해 국내 10대 그룹 상장사의 등기임원 평균 보수는 최저임금의 140배가 넘는다. 상위 10%의 소득은 국민 총소득의 48.5%에 달한다. 반면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25.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월 200만원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1000만명이 넘는다. 살찐 고양이들의 하품 소리가 졸라맬 허리띠조차 없는 노동자들의 한숨 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게 한국 사회다. 애덤 스미스의 “큰 부자 한 명이 있으려면 500명의 가난뱅이가 필요하다”는 말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소득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심 후보가 공약으로 제시한 ‘슈퍼우먼 방지법’ ‘최저임금 인상’ ‘주 35시간 노동’ ‘비정규직 철폐’ 등에는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의지와 열망이 담겨 있다. 그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광장에 울려 퍼졌던 ‘이게 나라냐’는 탄식 없이 ‘같이 좀 잘사는 사회’”를 꿈꾸고 있는 듯하다. 노동자들을 ‘새롭게(new) 대우하겠다(deal)’는 뉴딜 정책을 펴며 빈부격차 없는 사회를 꿈꿨던 루스벨트처럼.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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