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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이다. 한 해를 마감하기 사흘 전에 찾은 광화문광장에 부는 바람은 찼다. 하지만 가을 끝자락에서 겨울로 진입하던 때 뜨겁게 달궈졌던 광장의 열기는 칼바람에도 식지 않았다. 작가 최인훈은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고,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두 공간의 어느 한쪽을 가두어버릴 때 인간은 살 수 없다”고 했다. 그가 옳았다. 광장의 촛불은 밀실의 어둠을 몰아냈다. 죽어가던 민주주의를 살려낸 광장은 위대했다. 1000만개의 촛불로, 질서 있는 분노로, 저항의 함성으로 가득 찼던 광장은 명예혁명의 산실이었다. 헌정파괴와 국기문란을 일삼은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 열차에 올려 태운 광장의 명령은 준엄하고도 단호했다. 세밑 광장은 앙시앵레짐(구체제)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작을 간구하는 외침으로 가득 차 있다. 70년간 쌓인 적폐를 걷어내고,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외침이다.

그런 광장이 막혔다면? 촛불시민은 역사의 패배자로 남고, 세상은 불의와 부패, 부정이 판치는 기득권 세력의 놀이터가 됐을 게 뻔하다. 끔찍한 일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최고의 통치자는 백성에게 자신의 존재만 알게 하고(太上下知有之), 최악의 통치자는 백성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其次侮之)”고 했다. 그가 옳았다. 연설문 작성과 관료 인선, 정책 결정을 비선 실세에게 맡긴 대통령은 무능·무지·무책임했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휴대전화 녹음파일을 복구한 검찰은 “(최순실과 박근혜의 통화 내용을) 10분만 들으면 ‘대통령이 어떻게 저 정도로 무능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독재자 아버지의 허상에 기대 권력욕만 키운 대통령은 비선 실세와 측근들에게조차 조롱의 대상이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7차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청와대 인근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폭죽을 쏘아올리고 있다. 이준헌 기자

문화계 황태자로 불린 차은택은 국정조사 청문회에 나와 “최순실과 박 대통령은 동급으로, 공동정권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40년 지기 최순실은 “아직도 지(박근혜)가 공주인 줄 아나봐”라는 말을 자주 했다. 검찰도 국정농단 주범들의 관계를 ‘지시하는 가부장적 남편’(최순실), ‘아내’(박근혜), ‘사촌’(문고리 3인방)으로 명료하게 정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대통령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고, 저 혼자만 똑똑하고 나머지는 다 병신들”(김종필 전 총리)로 여길 정도로 오만했다. 그런 최악의 통치자를 업신여기지 않을 시민이 있다면? 아마 ‘혼이 비정상’일 게다.

알제리의 식민해방투쟁가 프란츠 파농은 “어리석은 권력은 민중의 목소리를 거부하다가 끝내 자멸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가 옳았다.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대통령은 친일·독재를 미화한 국정 역사교과서,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 동북아 신냉전을 불러온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남북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 폐쇄 등을 일방적으로 강행했다.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게이트의 주범이면서도 자신의 책임은 털끝만치도 인정하지 않았다. 간교한 정치적 술수로 ‘막판 뒤집기’만을 노리다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 대통령을 시민들은 ‘죄의식 없는 확신범’으로 여길 뿐이다.

영국의 신학자 스티븐 체리는 “용서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옆구리에 깊숙이 박힌 창을 내 손으로 뽑아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게 용서”라고 했다. 그가 옳았다. 세월호 침몰 당일 304명의 고귀한 생명이 수장될 때 올림머리를 하느라 90분을 허비한 대통령을 용서할 수 있을까. 구의역 19살 노동자와 백남기 농민이 죽어갈 때, 청년들이 ‘헬조선’을 외치며 신음할 때, 서민들이 생활고로 절망할 때 청와대 관저에서 미용주사를 맞고 ‘혼밥’을 먹으며 TV를 보던 대통령을 용서할 수 있을까.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탄핵심판 답변서에 “최순실 국정 관여 비율은 1% 미만” “세월호 참사 때 청와대에서 정상 근무” “측근비리가 발생한 역대 대통령도 탄핵 대상”이란 막가파식 논리를 편 대통령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런 대통령을 옆구리에 깊숙이 박힌 창을 뽑아내는 고통을 견디며 용서할 시민이 있다면? 아마 ‘박사모’ 회원일 게다.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해가 바뀌어도 잊지 못할 이름들이 있다.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이들의 이름은 ‘1분 소등’ 시위 때 광장에 울려 퍼졌다. “최강서, 이운남, 이호일. 박근혜 당선 직후 목숨을 끊은 노동자들의 이름입니다. 고창석, 이영숙, 권혁규, 박영인, 남현철, 허다윤, 조은화, 양승진, 권재근. 세월호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이름입니다. 김관홍, 최종범, 염호석, 한광호, 송국현, 백남기, 김주영. 박근혜 정권에서 희생된 분들의 이름입니다.” 촛불항쟁의 길을 터준 이들의 이름은 산산이 부서지고, 허공에 흩어졌어도 시민들은 설움에 겹도록 부르고 또 부를 것이다. 잊지 못할, 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이름이기에….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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