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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사태와 관련된 보도들을 보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과거 박근혜 영애와 최태민이 ‘새마음갖기운동’을 대대적으로 조직하며, ‘충효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이다.

산업화의 성과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드러나면서, 1990년대 한국에서는 ‘충효’로 대표되는 유교 이념에 기초한 집단주의 문화에 생경함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감하게도 직장 회식에서 빠지려는, 뿐만 아니라 그런 태도에 아예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출현했다고 한다. 언론에서는 야단을 떨어 댔다. 당시는 술자리에서 입만 열면 발렌타인 몇십년산 같은 말들이 술술 나오는, ‘부’에 도취한 시절이었다.

자신을 주장하는 젊은이들을 사회가 이해하는 방식은, ‘부에 도취된 세대’라는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의 다소 ‘개인주의적’인 태도가 과장되게 해석되었고, 도덕적으로 판정되었다. 개인의 개별성을 주장하는 것이 곧 이기주의로 폄하되었고, 특히 고학력이거나 취업한 여성들이 그중에서도 가장 명확한 표적으로 도드라졌다. 그러나 이 여성들이 차츰 소비력을 가진 ‘지갑’으로 인지되면서, ‘골드미스’나 ‘알파걸’처럼 이들에게 아부하는 단어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 널뛰기판 위에서 여성들은 페미니즘적 태도를 표출했고, 우리가 최근의 복고적 방송들을 통해 확인했듯이 특히 가요를 통해 페미니즘이 당당히 표현되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젊은이들이 공동체성을 잃고 있다고 걱정했다. 여성학자들도 ‘개인’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말하자면 진보든 보수든, 페미니스트든 반페미니스트든, 기성세대에게 개인주의는 도덕적 병리현상으로 여겨졌고, 젊은이들은 탈정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존재들로 인식되었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산업화의 눈부신 성공으로 ‘아시아적 가치’가 알게 모르게 자랑되고, 개인주의에 대한 반감은 더욱 당연시되었다.

이렇게 세대 간 문화차이로 이해되었던 ‘개인주의 대 집단주의’의 대결은, 1997년 외환위기 및 이후의 신속한 신자유주의화를 거치며 ‘김치녀 대 개념녀’의 여성혐오적 대립으로 치환되었다. 기성세대가 ‘병리적 현상’으로 치부하는 ‘개인주의’는 미래의 전망을 잃은 젊은 남성들에게 ‘한국여성의 혐오스러운 특징’으로 재해석되었다. 젊은 남성들은 회식자리에 끌려가는 것을 오히려 ‘취업자의 호강’으로 느끼는 ‘미생’이 되었고, ‘개인’은 신자유주의적 경쟁과 이기주의의 산물이거나 또는 ‘금수저’의 사치로 단순화되었다.

그런데 ‘충효’를 통치이데올로기로 굳히는 데 앞장선 ‘새마음갖기운동’이 결국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이 게이트에 반대하여 광화문을 메운 촛불을 보면서, 젊은 세대의 문화에 대한 과거의 판단들이 얼마나 편견이었는지를 실감한다. 광화문광장 정치의 중심에는 바로 ‘개인’들이 있다. 이들은 계급이나 성, 민족 등의 집단정체성을 앞세우지 않는다. 이들은 개인을 ‘국민’ 또는 ‘시민’이라는 정치적 지위로 매개하는 ‘헌법’을 수호하고자 한다. 이들은 조직되지 않은 개인들이지만 고도로 정치적이다. 이들은 셀카에 열중하고 마치 소풍 온 가족처럼 광장 한가운데 앉아서 음식을 나눠 먹지만, 이렇게 지극히 사소한 행위들이 바로 거대한 축제처럼 보이는 정치행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말하자면 이제 한국 사회에서 정치가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나 사회에 대한 관념 역시 변화하고 있다. 개인은 도덕적 타락의 징조도, 신자유주의만의 부속품도 아니다. 개인마다 가진 개별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성격의 정치적·사회적 ‘연대’가 가능해질 것이다. 광화문의 정치는 이것을 말하고 있다.

홍찬숙 | 서울대 여성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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