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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前兆)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국무회의에서 자동차·조선 등의 실적이 호전되고 있다며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을 인용했을 때다. 보수야당·언론은 “물이 어디서 들어오냐”며 예의 비판의 날을 세웠다. 자동차·조선업은 여전히 어려운데,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에게 잘못된 보고를 하고 있다는 개탄이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언급은 눈 밝은 보수라면 환영했을 표현이다. “밀물이 들어오면 모든 배가 뜬다”는 이론을 연상시켜서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써서 유명해진 이 표현은 이후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 보수 우파 경제계에서 즐겨 인용해 왔다. 세금을 깎아주고 각종 규제를 완화해 부자들이나 대기업이 호황을 누리면 경제가 성장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중소기업도 함께 잘살게 된다는 의미다. 위(부유층)에 있는 그릇에 물(소득)이 넘치면 아래(저소득층) 그릇으로 흘러내린다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와 같은 애기다. 실제 대기업 밑에 많은 하청 기업들이 있는 자동차·조선업은 이 이론을 적용하기에 맞는다. 문재인 정부가 드디어 ‘밀물(대기업 중심 성장)’의 중요성을 인정하게 된 것인가.

그 전조는 한 달이 지난 지금 현실이 되고 있다. 정부가 지난 17일 발표한 ‘2019년 경제정책방향’에는 대기업에 의존해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의도가 짙게 묻어난다. 현대자동차그룹의 105층짜리 신사옥 착공과 대기업 건설사들이 참여할 도로·철도·터널·항만 등 각종 사회간접자본(SOC) 건설 등을 통해 대규모 민간투자를 유도하겠다고 한다. 이 과정에 예비타당성 조사 등 각종 규제는 완화될 것이다. 자동차·조선·디스플레이·석유화학 등 4대 주력산업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재정·세제·제도적 지원도 약속했다. 정부가 내년 상반기에 중점 추진하겠다는 주요 16개 과제 중 10개가 성장 촉진 정책들이다. ‘대기업’ ‘성장’ ‘SOC’ 등 문재인 정부 들어 사라졌던 경제용어들이 부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 전환은 낯설긴 하지만 이유는 짐작이 된다. 투자와 고용 등 경제지표가 악화되고, 이를 빌미로 보수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지지율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내년까지 경제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면 내후년 총선이 위험하다. 그러다보니 조기에 성과를 내야 하고, 이에 가장 유력한 방편인 대기업과 SOC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부 경제지표들이 호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민들의 삶은 나아질까. 안타깝게도 낙수효과의 측면을 본다면 가난한 사람들까지 잘살게 하기는커녕 양극화를 확대하고 결국 성장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반론이 제기된 지 오래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인 국제통화기금(IMF)조차 2015년 전 세계 159개국을 분석해 낙수효과는 ‘효과’가 없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와 영국의 ‘대처리즘’을 시작으로 신자유주의 바람이 거세게 분 결과 세계 경제가 저성장 기조로 떨어지고 불평등은 심화되면서 끝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파멸을 맞았던 역사는 낙수효과의 한계를 생생히 보여준다. 물이 들어오면 큰 배들은 열심히 노를 저어 나가지만 작은 배는 큰 배에 치여 좌초하기 십상이다.

경제심리가 악화된 상황에서 정부가 기업 투자를 유도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정책은 펼칠 수 있다. 주력 산업의 침체로 성장잠재력이 저하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해당 산업을 지원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기업이 살아나도 하청업체들이 원청의 납품가 인하 압박 등 갑질에 시달리면 낙수효과는 없다. 성장을 해도 그 과실이 제대로 된 복지제도를 통해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낙수효과는 없다.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목숨을 걸고 일하는 노동자가 넘쳐나면 낙수효과는 없다. 그런데 정부의 경제활력 제고 방안에는 이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낙수효과에 귀의했다고 단정할 순 없다. 동서고금에서 개혁에 저항하는 기득권층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왔던 전략이 통했을지도 모른다. 불평등 연구의 대가인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그 전략을 “극단적인 불평등이 지속 가능한지 여부는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얼마나 효과적인지에 주로 달려 있다. 가령 부자들이 더 많이 벌지 못하도록 막으면 사회의 가장 궁핍한 구성원들에게 불가피하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불평등이 정당화될 경우, 소득의 집중이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수도 있다”고 정리한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문재인 정부가 왜 탄생했는지, 그래서 추구해야 할 목표와 가치가 무엇인지 잊지 않았기를 바란다.

<김준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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