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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경향의 눈]역사 부정

opinionX 2019. 2. 14. 11:32

“아우슈비츠 얘기에 뭐 그리들 조심스러운지. 속 시원히 말하지만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 차 뒷자리에서 죽은 여자의 수가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보다 많습니다.” 2017년 개봉된 영화 <나는 부정한다(Denial)>는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영국의 사학자 데이비드 어윙(티모시 스폴 분)의 연설로 시작한다. 그는 “히틀러의 부관 루돌프 헤스는 독일의 영웅이자 순교자이고, 아우슈비츠엔 가스실이 없다”고 말한다. 한국 사회를 흔들고 있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부정론’은 실화를 옮긴 <나는 부정한다>의 ‘데자뷔’다.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은 “우파는 5·18 문제만 나오면 꼬리를 내린다. 힘 모아 투쟁하자”고 했다. 이종명 의원은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변질됐다”고 했고, 김순례 의원은 “5·18 유공자는 괴물집단으로 세금을 축낸다. 명단을 공개하라”고 말했다. 하나같이 역사를 비틀려는 망언들이다. 극우논객 지만원씨는 “전두환은 영웅이다. 5·18은 북한군이 주도한 게릴라전이다”라는 궤변을 쏟아냈다.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다양성의 일환이다”라는 한국당 지도부의 두둔 발언도 이어졌다. 이 정도면 ‘5·18 부정론’은 고개를 든 수준이 아닌, 대놓고 부정하겠다는 ‘시위’ 수준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2월 14일 (출처:경향신문DB)

이들은 부정의 근거로 “북한 인민군의 최근 사진 속 인물들이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과 일치한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발포명령을 한 바 없다” 등 주장을 편다. 이는 “히틀러의 유대인 몰살 명령서는 없다” “가스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이 지어낸 괴담으로 보상금을 뜯어내려는 수작이다” 등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 늘 하던 말이다. “국가나 군이 ‘위안부’ 제도에 관여했다고 증명할 문서 기록이 없으므로 일본군 위안부는 사실이 아니다”라는 일본 부정론자들의 주장도 다를 바 없다.

역사적 진실을 폄훼하는 부정론은 왜 제기되는 걸까. 최근 <기억 전쟁>을 펴낸 임지현 서강대 교수는 “역사적 진실이라는 기억에 흠집을 내려는 ‘기억 정치’”라며 “부정론자들은 자신의 말이 틀리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혐의를 진실에 덧씌우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부정한다>로 다시 돌아가보자. 어윙은 “나를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로 언급, 모욕했다”며 미국 애틀랜타 에모리대학 데보라 립스타트 교수(레이철 바이스 분)를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한다. 이후 4년간 32차례의 법정다툼이 벌어진다. 어윙의 역사 부정은 변호사 리처드 램프턴(톰 윌킨슨 분)에 의해 차례차례 허물어진다. “가스실에 구멍이 없으니 아우슈비츠에는 가스실이 없다”는 주장은 “가스실은 영안실과 나치 친위대 대피소였다”는 어빙 자신의 비논리적 진술로 무너진다. 일기에 적은 ‘난 유대인도 혼혈도 아닌 아리아인 아기. 유인원이나 흑인과는 결혼할 생각 없네’라는 어린 딸의 시 내용 때문에 어윙이 인종주의자, 반유대주의자라는 사실도 들통난다. 램프턴은 어윙이 저지른 25개 이상의 역사왜곡 사실을 들어 고소의 부당함을 지적했고, “어윙은 고의적으로 증거를 왜곡하고 조작했다”는 역사적 판결에 다다른다.

법정공방의 결론으로 홀로코스트 부정론이 사법적으로 단죄됐다는 점은 통렬할 수 있다. 그러나 재판 도중 판사가 ‘표현의 자유와의 충돌’ 때문에 고심하는 것에서 확인되듯, 학문의 영역 내에 있어야 할 역사적 주의·주장을 사법적으로 정의했다는 오류를 범한다. 이는 어윙이 법원 판결 직후 TV 시사프로그램에 출연, 마치 승리자인 양 말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부정론자들은 혐의 덧씌우기와 법정다툼을 통해, 역사적 진실에 흠집을 내는 데 성공했다고 자위하는 것이다.

여기에 ‘5·18 부정론’을 마주한 한국 사회의 해법이 존재한다. ‘5·18은 전두환 등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 세력에 맞서 광주시민들이 벌인 민주화운동’이라는 진실은 변할 수 없다. 북한군 개입설은 국방부도 “근거가 없다”고 부인한 사실이다. 부정론자들의 의도대로 ‘5·18’을 다시 법정에 세우려 한다거나, 또 다른 혐의를 덧씌우려는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된다. 더디더라도 학계에서 걸러지도록 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편견과 폭력을 부추기는 ‘헤이트 스피치(혐오발언)’를 처벌하는 법을 제정, 포괄적으로 다루면 될 일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기억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다. 산 자가 죽은 자의 목소리에 응답해서 그들의 원통함을 달래야 한다”는 것이 &lt;기억 전쟁&gt;의 결어다. 곧 활동을 시작할 ‘5·18 진상규명특별위원회’는 물론 살아 있는 우리 국민 모두가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광주시민의 ‘목소리’에 응답할 때인 것이다.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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