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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말벌은 바퀴벌레를 침으로 쏘아 마비시킨 뒤 그 몸속에다 알을 낳는다. 알에서 나온 보석말벌 애벌레는 바퀴벌레의 몸을 먹으며 자란다. 먹이를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해 항균물질을 분비하고 숙주가 죽지 않게 치밀한 순서에 따라 장기를 갉아먹는다. 불쌍한 바퀴벌레는 애벌레가 완전히 자라 몸 밖으로 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산 채로 몸을 파먹힌다. 잔혹하지만 곤충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찰스 다윈이 같은 방식으로 번식하는 맵시벌을 보고 “자비로운 신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창조하셨을 거라고는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동료 생물학자에게 실토한 일화는 유명하다.

얼마 전 출간된 댄 리스킨의 <자연의 배신>은 온화하고 풍요롭고 조화롭고 완벽한 곳인 양 표현되는 인간 중심의 자연관을 180도 뒤집는다. 자연은 아름다운 한 장의 풍경사진이 아니라 사기, 절도, 강간, 유혹, 불륜, 배신, 복수가 뒤엉킨 생존과 번식의 막장 드라마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다윈도 통탄했듯이 자연의 작품이란 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솜씨 없고 낭비적이며 실수투성이에 저열하고 징글징글하게 잔인하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자연의 배신’은 바로 우리 정치의 모습이기도 하다. 최근 ‘성완종 리스트’ 정국에서 많은 사람이 느끼는 것이 바로 ‘정치의 배신’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깨끗하고 양심적이고 정의롭고 민주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상식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은 데 대한 배신 말이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경향신문과 마지막 인터뷰를 하고 자살한 것은 지난 9일이다. 이 사건의 본질이 현직 총리와 전·현직 대통령 비서실장 등 여권 실세 8명이 언급된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의 진실 규명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연루된 인사가 대부분 친박계인 데다 2012년 대선자금과도 연결돼 있어 박근혜 정권의 기반을 흔들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런데 20일 남짓 지난 지금 이상한 상황으로 변했다. 초점이 엉뚱한 데로 옮겨졌다. 성 전 회장이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5년과 2007년 특별사면을 받은 것에 맞춰져 있다. 희한하게도 여권이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어느새 여야가 공방을 주고받는 구도로 바뀐 것이다.

검찰 수사 또한 무슨 조화인가. 경남기업에 대해 3차례나 압수수색을 하고 성 전 회장 측근 2명을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하면서도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8명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수사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일부는 핵심 증인을 회유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한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런데도 검찰은 이들 수사에 속도를 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분노할 필요 없다. ‘자연의 배신’에 공감한다면 ‘정치의 배신’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보석말벌이나 맵시벌을 사악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안전하게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고, 그렇게 진화했을 따름이다. 그들의 행동이 끔찍하고 역겨울 수는 있지만 그것을 선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정치판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이나 정치세력 또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 거짓말, 억지, 변명, 말바꾸기, 물타기, 역공세, 말맞추기, 유체이탈 화법… 이런 것들이 바퀴벌레의 몸에서 깨어난 보석말벌 애벌레의 행동처럼 정치인의 생존 본능이 절박하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다만 보석말벌의 그런 행동은 자연선택에 의해 유지되지만 정치인의 그것은 유권자의 지지라는 인위선택에 좌우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성완종 리스트 정국에서 나온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의 ‘경향신문 압수수색론’이나 김진태 의원의 ‘황희 정승 간통·뇌물 발언’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주장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권·김 의원이 정치인이 된 것도, 그들의 향후 정치생명도 결국 유권자의 선택에서 비롯됐고, 또 그것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재보궐선거를 하루 앞둔 28일 서울 관악구 난향동주민센터에서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투표소를 설치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내일 치러지는 4·29 재·보궐선거가 그래서 새삼 주목된다. 국회의원을 뽑는 서울 관악을, 경기 성남 중원, 인천 서·강화을, 광주 서구을 등 4곳의 판세를 여야 모두 초접전으로 전망하고 있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선거 결과에 어떻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가 관건이라고 한다. 자연이 완벽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듯이 정치가 그런 것은 어쩔 수 없다. 배신의 그림자는 자연 생태계는 물론 정치 생태계에도 상존한다. 유권자의 선택은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때로는 정치가 위대해 보이거나 우아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건 틀림없이 그것 때문이다.


신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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