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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은 1978년 11월9일자 ‘독립문과 민족정신’ 제하의 사설에서 독립문 이전에 반대한 바 있다. 치욕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독립문을 옮기겠다는 서울시를 질타한 것이다.

영은문은 조선시대 태종 때인 1407년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세운 모화루(모화관) 앞에 만든 홍살문이 전신이다. 영조문이라 부르다 중종 때 명나라 사신 설정총이 영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명나라를 상전으로 받들라는 사대주의의 표현이다. 얼마나 오만방자한, 그러면서도 모욕적인 이름인가. 조선의 왕들은 명과 청의 사신들이 천자칙서를 가지고 오면 이 문까지 나가 큰절을 하고 맞아들였다고 한다. 500년간 이어져온 수치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독립협회를 조직한 서재필은 1898년 사재를 털고 기금을 모아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자주의식과 독립정신을 새기겠다는 뜻에서다. 지금의 독립문 사거리 한가운데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렇게 세운 독립문은 개발논리에 밀려 쫓겨났다. 서울시가 독립문 위로 고가도로가 지나가도록 도로계획을 확정하면서 이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독립문은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장식물처럼 서 있다. 당연히 장소가 가지는 역사성은 훼손됐다. ‘여기가 치욕의 장소이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이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게 됐다.

서울시는 광화문광장을 뜯어고치겠다고 나섰다. 재구조화란 어려운 용어를 썼지만 개발시대 논리에 포장지만 바꾼 것이다. 서울시는 재구조화의 목표를 세 가지라고 했다. 600년의 역사성, 3·1운동과 촛불혁명의 ‘시민성’, 지상·지하를 잇는 ‘보행성’의 계승·회복이다. 광장 확장, 역사광장 조성, 충무공 동상 이전, 대규모 지하도로 조성, 광역철도역 설치 등이 주요 사업이다.

서울시는 역사성을 살리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역사공원을 조성하고 월대와 해태상을 세우겠다고 했다. 역사는 만들어진 것도 있고 만들어지는 것도 있다. 촛불이 타올랐던 광화문광장은 역사의 현장이다. 그곳에서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정의를 외쳤다. 그런데 서울시는 촛불정신을 살리겠다면서 역사의 현장을 부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심장이 뛰는 생명체를 죽여 박제로 만들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박물관을 세우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종로 한가운데 서 있는 충무공 동상만큼 풍상을 겪은 기념물도 많지 않다. 충무공 동상은 1968년 4월27일 건립됐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이라든가, 동상의 형태나 건립 장소가 잘못됐다는 논란이 일었다. 동상의 얼굴이나 칼을 쥔 모습, 옷의 길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또한 ‘지명에 맞게 동상을 충무로로 옮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동상 재건립은 “차라리 그 돈을 서민들을 위해 사용하자”는 여론에 밀려 무산됐다. 이전 문제도 1994년 서울시 문화재위원들이 “충무공이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고 동상 자체가 1968년에 세워져 이미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못 박으면서 마무리됐다. 서울시는 광화문광장 재구조화를 말하면서 1968년 세워진 충무공 동상 이전을 거론했다. 그러면서 1985년 개업한 ‘을지면옥’ 이전에는 반대했다. 충무공 동상이 을지면옥만도 못하단 말인가.

서울시는 걷기 좋은 환경을 거론하면서 광화문 인근에 대규모 지하도로를 만들겠다고 했다. 춥거나 비가 올 때 이동의 편의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또 서울시는 광화문광장에 광역철도까지 들어오도록 하겠다고 한다. 서울시민은 굴속에 사는 동물이나, 혼잡한 도로에서 이리저리 차이는 짐짝이 아니다. 지상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푸른 하늘과 산을 조망하며 즐겁게 거닐 수 있는 게 ‘걷기 좋은 서울’이다.

광화문광장은 2008년 대공사를 거쳐 재조성됐다. 여론조사까지 벌여 광장을 중앙에 조성했다. 그런데 불과 10년을 갓 넘어 서울시는 다시 만들겠다고 나섰다. 공사비는 1040억원이 넘는다. ‘돈이 썩어나냐’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도 박원순 시장은 밀어붙이겠다고 한다. 공사를 끝마치겠다는 목표는 2021년이다. 차기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다. 우연치고는 너무 작위적이다.

40년 전 독립문 이전을 반대했던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서울시는 지금까지 숱한 시행착오로 예산 낭비와 시민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해 왔다. 그러면서도 낭비와 손실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철저한 책임추궁이 따라야 할 것이다. 이대로 넘어간다면 서울시의 난맥상은 계속될 것이고 문화재를 깔보고 덤비는 작태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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