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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반응은 싸늘했다. 엊그제 3·1절에 공공기관이나 주요 도로는 태극기 물결로 넘쳐났다. 하지만 일반 가정집이나 이면도로에선 찾기 힘들었다. 간간이 태극기가 빼곡히 걸린 주택가나 일반도로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는 하나같이 정부와 지자체가 지정한 태극기 달기 ‘모범거리’나 ‘모범마을’이었다. 집주인이 아니라 구청, 동사무소 직원이 달아준 것이다. 그 외 대부분 가정집과 도로의 태극기 게양률은 10%를 밑돌았다. 국가의 상징 태극기도, 국가 기념일도 갈수록 푸대접 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국가 기념일의 저조한 태극기 게양률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기념일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태극기 달기에 대한 거부감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초·중·고생 10명 중 4명이 3·1절을 잘 모르고, 심지어는 ‘삼점일절’ 운동으로 발음하는 학생도 적잖다고 한다. 역사 교육의 중대한 문제다.

이번 3·1절의 태극기 게양이 눈길을 모은 것은 정부가 대대적으로 태극기 달기 운동을 벌여서다. ‘광복 70주년 맞이 태극기 달기 운동’의 초라한 성적표는 이미 예견된 바다. 국민 다수가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낮은 현실과 동떨어진 캠페인이었기 때문이다. 애국심이 솟아나야 태극기를 달 텐데, 거꾸로 태극기 게양을 통해 애국심을 짜내려 했으니 억지였다. 지난 2년간 태극기 달기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을 키워온 정부가 운동을 벌인 것 자체가 코미디다. 입사지원서 100번 낸 취업준비생이나 연말정산과 담뱃값 인상으로 세금 더 내게 된 시민, 생때같은 가족을 잃은 것도 모자라 정부의 무관심에 이중으로 고통받는 세월호 유가족에게 태극기 달기 구호가 귀에 들어오겠는가.

이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경례 얘기를 할 때부터 알조였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영화 <국제시장>에서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나오면 국기에 경례를 하더라며 “그렇게 해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기에 경례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던 유신 시대의 비민주성은 뚝 떼놓고 애국가와 경례만 강조한 것은 획일화된 국가주의 발상이다. 어린 학생들이 어른 이마에 두른 태극 무늬 띠만 보고도 조건반사식으로 경례를 올려붙이던 암울한 시절을 40여년 만에 소환한 셈이다. 대통령 발언 직후 정부는 국기 게양·하강식 부활을 담은 법개정 계획을 들고 나왔다. <국제시장>의 부부싸움 장면은 흥미 유발을 위한 에피소드 기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박 대통령이 애국심의 표본으로 규정하자 충직한 관리들이 일사불란하게 1970년대식 ‘애국심 마케팅’을 고안한 것이다. 관료 사회가 국가주의의 잔재를 완전히 털어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태극기 달기와 애국심은 자발성에서 비롯된다. 2002년 월드컵 때 붉은악마가 그랬다. 3·1운동도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다. 이번에 정부는 “강요가 아니라 권고”라고 일관되게 부인했다. 그러나 태극기 달기 운동의 규모와 권위주의적 방식은 권고 형태의 강요임을 드러낸다. 10개 중앙부처와 17개 시·도가 참여하는 캠페인이 자발적 시민운동일 수 없다. 정부는 태극기 달기 실적을 연말 지자체 평가에 반영키로 했고, 지자체는 이를 공무원 복무 평가 지표로 삼기로 했다. 3·1절에 구청과 동 직원이 동원돼 모범마을에 태극기를 게양해주는 희한한 ‘쇼’가 벌어진 이유다. 충격적인 민심 조작이기도 하다. 대형 태극기 걸기 경쟁이 벌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행정자치부가 정부서울청사 외벽에 가로 33m, 세로 22m 태극기를 붙이자 경북도는 가로 110m, 세로 20m 태극기로 맞섰다. 외양은 갖췄지만 내용은 부실한 정부를 빼닮았다.

철학자 칸트는 현대 사회의 노예는 다른 사람이나 사회가 원하거나 지시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정부가 공무원과 국민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노예로 몰고 가려 하는 것 아닌지 의심이 든다. 이번엔 다행히 각성한 국민 다수가 정부의 무리한 요구를 거부했다. 태극기 달기 운동은 박 대통령 집권 3년차 첫번째 정책실패 사례다. 대통령은 이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 앞 국기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와 검찰 깃발이 세찬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출처 : 경향DB)


그럼에도 태극기 달기는 필요하다. 정파적 이해를 떠나 순국 선열의 얼을 되새기고 국민 통합을 이루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

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 개인의 행복의 크기가 국력의 크기가 되고 그 국력을 모든 국민이 함께 향유하도록 하겠다.” 이 말대로만 하면 충분하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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