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완벽은 옥(玉)이다. 중국 고사에 나오는 어떤 옥의 고유명사다. 퍽 아름다워 따로 벽(璧)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흠도 하나 없다고 완(完)자가 더 붙었다. 完璧이 ‘완전의 극치’라는 뜻으로 쓰이는 비유의 배경이다. 물론 재미난 고사도 그 뜻을 만드는 데 한 축 했다.

나쁜 기운을 막고 복을 부른다고 하여 중국인들은 옥을 무척 좋아한다. 천자(天子) 즉 황제의 이미지와도 통하는 용을 새긴 그들의 옥공예품은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하다. 우리 말글에도 옥 글자가 든 한자어가 많은 이유다. 한자어는 한국어를 구성하는 요소다.

옥석구분(玉石俱焚)은 옥과 돌이 함께[俱] 불탄다[焚]는 말이다. 이 말 또한 중국의 고사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인지 우리말에서 제법 힘이 세다. 말뜻도 모르면서 옥석구분을 (엉터리로) ‘옥석을 가린다’고 쓰는 사람들이 있다고, 어떤 이들은 언중(言衆)의 ‘무지함’을 신문의 칼럼 등으로 꾸짖기도 한다. 한자에 덜 익숙한 상당수 시민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존재일까? 도리어 이 말은 우리말의 큰 품을 느끼게 한다. 옥과 돌을 잘 가려야[구분(區分)] 급박한 일이 있을 때 (이 둘이) 함께 망가지지(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옥석구분의 적극적인 해석이리라. 실은 ‘옥석’이란 말에도 ‘뛰어난 것(옥)과, 그와 대비되는 (돌 같은) 평범한 것(의 구분)’이란 뉘앙스가 숨어 있다. ‘구분’이란 말은 그렇게 ‘가린다’ ‘함께 태운다’는 뜻을 함께 보듬는다.

그뿐인가? 사람마다 똑같이 나눠 준다는 구분(口分), 무덤이나 언덕 구분(丘墳), 개의 똥 구분(狗糞)도 있다. 기하 공부에서 나왔던 구분(球分)의 개념을 기억할 이도 있겠다. 미국 영화 주인공 맥가이버의 솜씨인가, 같은 말로 어찌 저리 여러 뜻을 쉬 품어내는지. 한글(훈민정음)은 몇 자 안되는 자음과 모음의 조합(組合)으로 우리 고유의 말이나 한자어, 외래어, 외국어 등을 너끈히 품어 풍부한 우리말을 이룬다. 바다는 이 물, 저 물 가리지 않아 온 누리의 바다가 된다. 바다처럼 통 큰 우리 말글을 바라보는 진짜 기쁨이다.

문자학자 김태완 박사(전남대)는 최근 저서 <중국의 상형문자>의 ‘한글과 한자’ 항목에서 ‘소리(내는 입)의 모양을 그려낸 한글은 세상 모든 이미지를 (특별히) 잘 구현한다’며, 이는 인류 문명의 소용돌이인 뭇 언어의 바다를 유유히 떠도는 돛단배를 연상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3일 서울도서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한글일일달력展>을 찾은 학생들이 다양한 의성어와 의태어로 표현된 캘리그라피 달력을 살펴보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한글은 ‘구분’의 경우처럼 한자(또는 다른 외국어)의 여러 뜻을 그 바다에서 붙들어 올려 그 이미지를 환히 우리 뇌리에 비쳐준다. 제 떠 있는 곳 바다가 여러 언어문화를 품은 든든한 ‘빽’이니, 그 효과적인 장치로 인류의 메시지를 단박에 새겨내지 못할 바가 없다는 것이다.

옥석을 함께 태워버리면[俱焚] 안 된다. 옥석을 가려서[區分] 일을 잘 도모해야 한다. 옥석구분의 ‘구분’을 俱焚으로만 한정해야 옳다는 그런 생각은 옥석을 함께 태워버리는 것과도 같다. 속 좁다고나 할까, 칼 든 얼치기의 망나니춤 보는 듯한 조마조마함이라고나 할까.

언어학자이기도 한 성군 세종의 뜻을 생각한다. 문자의 후발(後發) 주자로 표음의 글자를 만든 것은, 거인(한자)의 어깨 위에 우뚝 서야 한다는 우화적 상상력의 승리였겠다. 오늘 ‘거인의 어깨’는 다름 아닌 우리 말글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빠진 데 없는 지식이다. 내 말글, 튼실한 한국어 없이는 외국어도, 요즘 ‘유행’인 인문학도 성립할 수 없다는 상식을 다시 확인한다.


강상헌 |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