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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미국 실리콘밸리의 갑부들이 뉴질랜드에 지하 벙커를 짓고 있다는 외신이 전해졌다. 이 벙커의 최고급 모델은 체육관, 사우나, 수영장, 볼링장 등까지 갖추고 있는데, 가격이 800만달러(약 9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이 벙커를 짓는 이유는 핵전쟁이나 혁명 같은 ‘최후의 날’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외신은 세계 정·재계 고위인사들이 참가하는 다보스포럼에서 지난해 실리콘밸리 갑부들이 부를 독차지한 상위 1%를 겨냥한 혁명이나 격변이 올 것을 예상해 뉴질랜드로 피난하는 계획을 논의했다는 벙커 제작업체 측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 뉴스의 진위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한 가지 시사점은 준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고 있다는 21세기에 ‘혁명’을 두려워하는 자본가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거다.

혁명으로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멸망할 것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분석 또는 예언에는 ‘오류’ 딱지가 붙은 지 오래다. 마르크스는 자본은 계속 축적되면서 갈수록 소수의 손에 집중된다고 했다. 이에 따라 자본의 이윤율이 끊임없이 감소하거나 국민소득 중 자본가의 몫이 무한히 증가해 노동자계급의 폭력 혁명이 일어나면서 자본주의는 최후를 맞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혁명은 자본주의가 진전된 영국이나 독일이 아닌 유럽의 최후진국 러시아에서 발생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사회주의 체제도 100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21세기의 마르크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는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과 불평등의 심층적인 구조는 바뀌지 않았지만 경제성장과 지식의 확산 덕분에 마르크스적 종말은 피해갈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자본의 축적과 집중화에 균형을 잡아준 기술 진보와 생산성 향상 덕에 19세기 후반부터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이에 힘입은 노동자의 구매력 증가가 혁명적 상황을 막았다는 것이다.

20세기에 자본주의의 몰락을 막았다는 기술 진보의 혜택은 21세기인 지금도 유효할까. 안타깝게도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은 기술 진보를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을 위협하는 불평등 확대의 유력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 등 첨단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이를 습득해 활용하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에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기술 혁신이 20세기보다 훨씬 더 일자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산업에 적용되고 있는 점도 이 같은 주장을 거든다. 카카오의 ‘카풀’ 서비스에 반대해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6만여명의 택시기사들은 이런 우려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택시기사들은 카풀 서비스가 전면화되면 살길이 막막하다고 외친다.

택시기사들은 요즘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비상이다. 4차 산업혁명의 총아라는 공유경제의 선두주자 ‘우버’ 때문이다. 모바일 앱을 통해 승객과 택시를 연결해 주는 우버 택시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면서 우버는 기업가치가 1200억달러(약 135조원)에 달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영국 런던의 명물 ‘블랙캡’, 미국 뉴욕의 ‘옐로캡’을 망라해 우버 택시가 진출한 전 세계 도시의 기존 택시기사들은 엄청난 소득 감소에 직면했고, 처절하게 저항하고 있다. 런던 택시기사들은 우버 택시에 반대하는 시위를 넘어 우버에 5억파운드(약 7400억원)의 피해보상 소송을 준비 중이다.

뉴욕에서는 소득 감소에 고통받던 택시기사가 올해들어 지난 8월까지 6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심지어 지난 3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택시기사들은 화염병으로 우버 사무소를 공격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화염병이라니! 이쯤 되면 가히 ‘혁명 전야’ 아닌가. 우버 본사도 있는 실리콘밸리의 갑부들이 혁명이 무서워 머나먼 뉴질랜드에 도피처를 마련한다는 것이 이해가 될 만도 하다.

택시는 시작일 뿐이다. ICT나 인공지능(AI), 로봇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한 신산업들은 성공만 하면 그 사업가는 ‘대박’을 터뜨리지만 기존 산업의 일자리와 소득에는 타격을 준다. 이는 불평등의 확대, 양극화의 심화로 이어져 사회를 분노와 격변에 휩싸이게 할 수 있다. 이미 미국을 필두로 전 세계의 불평등이 최근들어 크게 심화되고 있다는 실증적 연구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한국도 정부가 추진하는 혁신성장이 성과를 낼수록 소득격차가 커질 우려를 배제할 수 없다. 혁신성장에 따른 이익의 분배나 환원 방식에 대해 지금 당장 진지하게 고민하고 논의해야 하는 이유다. “삶은 원래 공평하지 않다. 능력에 따라 사는 거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 진보의 혜택에서 소외된 계층에 대한 사회안전망 구축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거리를 볼 수도 있다.

<김준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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