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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 지리, 설악, 덕유 그리고 계방. 평창의 계방산은 남한에서 다섯번째로 높은 산이다. 오대산보다도 키가 크지만 제 이름을 주장하지 않고 오대산국립공원의 한 일원으로 자리하는 겸손한 산이기도 하다. 아래에서부터 시작하면 힘들기 그지없겠으나 산의 어깨쯤에 해당하는 운두령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운두령, 그야말로 구름의 머리를 만지는 기분이다. 초입에서 가파른 몇 계단을 오르니 고산의 평원에 바로 도달한 듯 남다른 기운이 후끈하다. 후드득 피어난 꽃들도 자세와 씨알이 다른 산에 비해 굵다. 감질나게 한두 개가 아니라 무더기로 피어 있는 당개지치, 얼레지, 홀아비꽃대. 진달래는 색이 아주 선명하다. 저 아래에서는 이미 종적을 감추었겠으나 여기에서는 전혀 새로운 계절 감각을 구가하는 중이다.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건 은방울꽃이다. 더할 나위 없도록 ‘야물딱지게’ 피어난 꽃. 둥글넓적한 마음씨처럼 잎이 길게 나오고, 별도의 꽃줄기에 꽃들이 오종종하게 달린다. 한껏 차려입고 나란히 외출한 꽃 형제들. 또한 겸손하기 이를 데 없어 땅으로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만한 높이라면 선경(仙境)이라고 해도 되겠다. 더구나 봄과 여름의 경계를 나누는 듯 비가 내려 신비 속에 몸을 담근 기분이었으니 꽃과 어울린 돌 하나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사람이 삽으로 마무리한 모든 무덤이 지하로 떠나는 이들의 마지막 뒷모습이라면, 산에 있는 모든 돌들은 지금 세상으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점점 그 어떤 꼴을 갖춰나가고 있다. 원근을 조절하며 돌 앞에서 몇 발짝을 산보(散步)하면 하! 할머니의 얼굴이 되기도 한다. 조리개 돌리듯 고개를 돌리며 초점을 맞추면 어!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지금 은방울꽃 옆에 의젓하게 자리잡은 돌은 어느 고대인의 얼굴 같기도 하다. 거지 같은 욕망으로 들끓는 지금의 내 얼굴도 언젠가 저 돌의 표정을 닮을 수 있을까. 비에 젖는 돌, 물에 씻기는 꽃. 그 둘을 바라보는 우산 속의 한 복잡한 사내.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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