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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5년 부처님오신날. 멀리 큰 산에 가지 못하고 사무실 뒤 심학산에 올랐다. 어느새 짙은 녹음. 여러 잎사귀와 잎사귀들 사이로 기이한 모양의 새들이 숨어 있는 것 같다. 호젓한 길바닥에 납작 엎드린 그림자 사이로 찰랑찰랑 햇살은 심연의 물고기처럼 뛰어오른다. 그 둘레길의 한끝에 약천사가 있다. 지장보전 처마 끝에 딴 세상으로 가는 입구 같은 풍경(風磬). 그 옆의 글귀가 가슴을 때린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무엇에 묶이고 무엇을 두려워하랴.” 이 문장을 만난 것만으로 오늘 하루는 수지가 맞았다. 이를 다만 아는 것을 넘어 저 뜻을 제대로 체득한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따라 허공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루는 간단히 하루 만에 저문다. 자유로에 올라 귀가하는 길. 날이 날인 만큼 언젠가 들었던 도올 선생의 강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우리 불교사의 한 획을 그으며 활약한 고승을 하루로 요약하면 이렇다. 신라의 원효(元曉)가 새벽을 열자, 고려의 보조(普照)는 한낮을 두루 비춘다. 서쪽으로 기우는 저녁 햇살 같은 조선의 서산(西山), 근대의 경허(鏡虛)는 이윽고 찾아온 텅 빈 밤이라는 것.

지금 사나운 역병의 기세가 세상 곳곳에 근심을 드리우고 있다. 그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집을 나선 이들이 짧은 통풍구처럼 휴일을 즐기고 돌아가느라 도로는 붐빈다. 난지도 지나 속도가 차츰 느려지더니 이윽고 한강의 대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각난 김에 떠오르는 대로 주섬주섬 챙겨보았다. 가양, 성산, 양화, 원효, 동작, 동호, 영동, 청담, 잠실, 천호, 강동, 암사. 한강의 다리 이름은 대부분 강북에서 잇닿는 강의 남쪽 지명을 땄다. 이윽고 나를 기다리는 다리가 나타났다. 누군가의 건장한 어깨를 밟고 가듯, 강 건너 피안으로 가닿는 저녁. 부처님오신날의 위력을 빌려 오늘은 반포대교가 아니라 반포대사로 불러보느니, 그렇다면 우리 사는 서울도 남산의 탑과 한강의 여러 고승들이 어울린 불국토인 듯!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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