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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 밀물 들면, 한강 하구의 여러 샛강에는 물이 역류합니다. 물만 불어나는 게 아니고 어느 날엔 안개도 스멀스멀 자유로를 성큼 건너뛰어 심학산 숲으로 진군합니다. 그제 아침에는 공중이 희붐하고 잔뜩 찌푸렸습니다. 는개인가요? 는개는 ‘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안개보다 조금 뚱뚱하고 비보다 조금 홀쭉하다고 여기면 되겠습니다. 그 는개에 몸을 섞으며 둘레길을 걷다가 한 단어가 떠오르는 특별한 풍경을 만났습니다.

미망인이라는 말. 하나하나 새기면 참 잔인하기도 합니다. 무슨 고사에서 유래된 말로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라든가요. 더구나 여성에게만 쓰이는 말이라니요. 해서 국립국어원 사전에는 ‘다른 사람이 당사자를 미망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가 된다’라고 보충해 놓기도 하였습니다.

제주 한라산 1100고지 휴게소에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등진 한 산악인의 동상이 있습니다. 바람꽃을 비롯한 각종 한해살이풀들이 피고 지기를 되풀이하는 공원의 그 동상 한 면에 미망인이란 단어가 박혀 있습니다.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나 높은 곳에 올랐다가 이승을 등진 남편이 남긴, 그야말로 ‘등이 휠 것 같은 무게’를 감당해야 할 그 세 글자를 오래 바라보게 됩니다. 백제의 무령왕릉은 배수로로 흘러드는 빗물에 우연히 그 발견을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그 송산리 고분군에 가면 이승의 것이 아닌 듯한 무덤의 곡선이 있고 그 봉긋한 잔디밭에 이렇게 특별한 한마디가 적혀 있습니다. “들어가지 마시오.”

예전에 참 서슴없이 썼던 그 미망인을 오늘은 내가 나한테 한번 써봅니다. 는개와 보슬비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심학산에서 만난 그 특별한 풍경이란 가시철조망의 무덤과 부적 같은 안내문이었습니다. 진달래가 저만치 서 있는 가운데 친절하게 엄포를 놓고 있더군요. “산소로 다니지 마세요.” 하늘이 던져주는 조금 굵어진 비를 우산으로 막으면서, 나는 그저 옆길로 새는 행인이어야 했습니다. 언젠가는 울타리도 지나고 그 너머로도 들어가야 하겠지만 아직 나의 신분은 미망인이었던 것입니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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