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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는 이미 다녀갔고 철쭉이 흐드러지게 위용을 떨치는 근황. 지리산 성삼재에서 반야봉, 천왕봉으로 가는 길에서 슬쩍 직각으로 몸을 돌려 만복대로 간다. 지리의 장엄한 주능선에 하나 꿇릴 것 없는 길이 휘몰이장단처럼 오르고 내린다. 이윽고 초록의 물감에서 땀에 전 몸을 정령치의 아스팔트 도로로 빼내려는 순간, 휘발유 냄새가 훅 끼쳐오는 인공의 계단 한쪽에 곰을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문이 적혀 있다. 국립공원에서 마련한 저 친절한 그림 속의 곰은 곳곳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쓰여 있기를, “산에서 곰을 만나게 된다면! 갑자기 곰을 만났을 경우 침착한 행동으로 천천히 그 장소에서 떠나도록 하십시오. 계속 가까이 접근해 올 경우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손을 크게 휘두르거나 소리를 질러 사람의 존재를 곰에게 알리십시오. 곰이 공격할 경우 막대기나 배낭을 사용하여 저항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급소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십시오.” 그러면서 실제로 땅에 납작 엎드린 자세, 태아처럼 다리를 꼬부리고 사타구니를 보호하는 자세를 표현하고 있다.

급소? 그림대로라면 사람의 급소는 사타구니에 있는가 보다. 그렇다고 그게 몸에만 있는 건 아닐 터이다. 노래에도 있고 시에도 있고 우리의 인생에도 있는 것. 그뿐인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지리산은 우리 국토의 한 급소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계절에 관계없이 이리도 산을 찾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그들 중에는 다른 산이 아닌 오로지 지리만을 흠모하고 동경해서 지리산만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지금 급소를 논하는 이 자리에서 진즉부터 이곳을 지켜보는 급소가 있으니 철쭉에 가득 달린 꽃이었다. 화사하게 공중을 수놓는 꽃, 접시 같은 층층의 잎을 배경으로 더욱 도드라지는 꽃들. 해마다 어김없이 나무가 벌겋게 흥분하여 내놓는 꽃, 꽃, 꽃들, 나무의 급소들. 그 여러 급소들 앞에서 문득 생각해보느니, 저 주의사항 속의 ‘곰’을 ‘삶’으로 바꾸어도 되겠다는!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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