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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랄, 난들 어디 이러고 싶었겠나. 온몸의 안테나를 있는 대로 가동했지만 브라주카가 이리 빨리 올 줄 알았나. 모든 신경과 솜털까지도 쫑긋 세웠지만 공이 모서리로 빨려들어갈 줄 알았나. 벼락치듯 공이 쩍 갈라놓은 허공에 허를 찔린 골키퍼는, 공보다 한 박자 늦게, 골문 안으로 내려꽂히고 만다. 철퍼덕!

무릇 축구에선 이기려면 스트라이커의 한 방이, 지지 않으려면 수문장의 선방이 필요한 법이다. 겨우 정신을 차린 골키퍼가 애꿎은 풀을 뽑으며 분을 삭이고 있는 동안, 화면에서는 브라주카의 활약이 한 번 더 펼쳐진다. 중원에서 넘실대던 공은 두 번의 긴 패스와 정교한 헤딩을 발판으로 딱따구리가 제집을 찾아가듯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간다. 이번에는 각도를 달리하여 보여주는 골키퍼의 추락. 클로즈업되는 것은 브라주카와 흰 그물이다. 태양을 상징하는 축구공. 원래 축구공은 오각형과 육각형의 패널을 이어붙였지만 보다 완벽한 구형을 위하여 브라주카는 6개의 패널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공은 표면이 요란해서 문양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브라주카가 철렁, 골망을 뒤흔들 때 확실히 알았다. 골대의 그물이 모조리 6각형이 아니겠는가.

경기를 보면서 육각형에 주목한 것은 연유가 있다. 몇 해 전 휘돌아드는 어느 골짜기의 작은 나무 앞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 나뭇가지 좀 보세요. 축구공의 무늬를 닮지 않았나요? 고광나무였다. 식물을 기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고광나무는 잎, 꽃, 수피가 아닌 가지의 형태에서 이런 특징을 찾는 것이다. 축구공, 아니 골대 그물 같은 고광나무. 어느덧 경기는 끝났다. 휘황한 전광판이 꺼지고 뿌리 없는 이들은 모두 떠났다. 선수도, 심판도, 응원객도, 브라주카도. 그라운드에 남은 것은 상처투성이의 잔디들. 그리고 줄기처럼 둥근 기둥으로 뿌리박은 골대, 아니 두 그루의 고광나무! 범의귀과의 낙엽관목.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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