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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가 다녀갔다. 너구리 다음은 더우리. 어느 신문의 날씨와 관련한 재치 있는 기사 제목에 외려 마음속 더위가 쪼끔 꺾이는 것도 같다. 너구리 꼬리를 붙들고 뒤따라온 건 폭염만이 아니었다. 모처럼 일요일에 한가히 뒹구는데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게 있었다. 올해 처음 듣는 매미 소리가 아닌가. 매미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특별히 나의 사정을 살핀 뒤 우는 건 아닐 테다. 귓구멍으로 지푸라기처럼 쏟아지는 무수한 말과 소리 중에서 그 가느다란 가락을 이제야 비로소 내가 잡아챘다는 얘기.

자글자글 우는 매미의 꽁무니를 붙들고 따라오는 기억이 있다. 일 년 전 이맘때의 일이라서 정확하게 생각난다.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의 녹전중학교. 운교산으로 통하는 학교 뒷산은 그야말로 깔딱고개였다. 가볍게 생각했다가 큰 코만 다칠 뻔했다. 겨우겨우 한 능선을 밟았는데 바위 사이에 그 나무가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전체적인 수형(樹形)은 진달래와 아주 흡사한데 꽃은 확연히 구별이 되는 나무. 흰 꽃이 가지 끝에 다닥다닥 뭉쳐 있고, 수술은 꽃잎보다 도드라지게 뾰쪽하다. 꼬리진달래였다.

오르기도 어렵지만 내려오는 데도 그만큼 땀을 쏟아야 했다. 그래도 귀한 꽃을 제대로 보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수업이 끝난 토요일 오후의 시골 중학교. 책 읽는 소리도, 공 차는 아이들도 없었다. 운동장에 흩어진 게으른 시간들이 수령 360년의 느티나무 아래로 수렴되는 듯. 우람한 느티가 제공하는 심심한 그늘에서 캔맥주를 따다가 퍼뜩 알아차렸다. ㅆㄹㄹ, ㅆㄹㄹ, ㅆㄹㄹ. 지금 귀에 닿는 이 소리는 올해 처음 듣는 매미 울음이 아닌가. 시원하게 한 모금 넘기는데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1763~1827)의 하이쿠 한 소절이 떠올라 목구멍을 때렸다. “올해의 첫 매미 울음/ 인생은/ 쓰라려, 쓰라려, 쓰라려.” 진달래과의 상록 관목.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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