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강릉시 옥계면의 석병산 중턱. 끊어질 듯 이어지는 희미한 등산로에서 녹색 잎들의 터널을 터덜터덜 걸어갈 때, 저만치에서 나무들의
그림자와 햇빛이 뒤엉켜 노는 것을 본다. 흑백의 그림이 총천연색의 그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다는 것을 확연히 느끼는 순간이다.
바람이 지휘하는 대로 일렁이는 녹색의 잎과 그 잎의 검은 그림자들. 그들을 밟겠다고 덤벼보지만 외려 나의 무딘 등산화를 타고 넘어
발등을 간지럽힌다. 어느새 마음도 그림자에 접착되니 덩달아 출렁거리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단순히 산에 오르는 게 아니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야생화들과 안면을 익히는 길. 그런 판에 앞서 가던 누군가가 “오매, 저기 박쥐나무 좀 보소!”라고
외치면 모든 눈들이 일제히 그 소리의 꽁무니를 따라 쫓아간다. 나무들 속의 나무는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 이리저리 가늠한
후에야 겨우 그를 찾아낼 수가 있다.
박쥐 수십 마리가 매달려 있는 듯한 박쥐나무. 그 박쥐떼 앞에서 어찌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으랴. 동굴 속의 박쥐라면 오금이 저릴
법도 하겠지만 이것은 순하디 순한 식물! 아무런 주저없이 가까이 가서 잎을 보면 정말 박쥐가 날개를 펼친 듯한 모양이다. 박쥐는
시방 어디에 머리를 감추었을꼬? 박쥐나무는 아주 귀한 나무는 아니라서 이산저산에서 여러 번 보았더랬다. 특히 박쥐나무의 꽃은
색상이 그리 요란한 것은 아니지만 그 형태가 단연 독특하다.
여덟 획의 꽃 화(花). 이 한자(漢字)는 마치 크고 작은 꽃잎 8장이 기대고 꼬부라지고 삐치면서 슬기롭게 조화를 이루는 모양을
형성하는 것일진대, 박쥐나무의 꽃은 그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 디자인! 노란 수술은 아래로 길게 늘어지고 하얀 꽃잎은 바깥으로
똥그랗게 말린다. 박쥐가 어두컴컴한 천장에 매달리는 것보다 훨씬 천의무봉하게 허공에 매달리는 박쥐나무의 저 빼어난 잎과 꽃을
보라. 박쥐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지난 칼럼===== > 이굴기의 꽃산 꽃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귀나무 (0) | 2014.07.07 |
---|---|
고광나무 (0) | 2014.06.30 |
사람주나무 (0) | 2014.06.16 |
[이갑수의 꽃산 꽃글]뻐꾹채 (0) | 2014.06.09 |
[이갑수의 꽃산 꽃글]이팝나무 (0) | 2014.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