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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김광균의 설야)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이후 아직도 안 잊히는 구절들이다. 시조 하나가 더 있다. “눈보라 비껴나는/全──群──街──道//퍼뜩 차창으로/스쳐가는 인정아!//외딴집 섬돌에 놓인/하나/둘/세 켤레”(장순하의 고무신).

완도 식생조사 갔다 오는 길. 까딱까딱 졸다가 깨어나니 스쳐가는 이정표에 부안, 줄포가 나오고 언뜻 군산도 보이는 것 같았다. 꼭 그 도로는 아니겠지만 전군가도와 이웃한 어디쯤일 듯. 어느 순간 퍼뜩 차창으로 달려드는 나무가 있었다. 초례청의 청실홍실 같은 꽃을 가지 끝에 활짝 달고 있는 자귀나무였다.

이 서해안고속도로와 나란히 달리는 경부고속도로에는 이런 안내판이 있다. ‘일본-한국-중국-인도-터키’. 이른바 아시안 하이웨이의 이정표다. 언젠가는 이 도로를 죽 달리면 실크로드까지도 갈 수 있다는 뜻이렷다. 몇 해 전 중국의 서쪽 변방인 신장 위구르 자치주를 여행했을 때의 일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가는 길에 이 지방의 빵인 난을 파는 가게에 들렀다. 예쁜 수건으로 치장한 두 여인이 젖먹이를 하나씩 안은 채 난을 굽고 있었다. 코를 흘리는 꼬마가 우리를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몇 십 년 전 내 어릴 적 모습을 꼭 닮은 꾀죄죄한 꼬마.

큰 자귀나무가 지붕 너머로 가게를 굽어보고 있었다. ‘자귀나무 난집’이라고 간판을 단다면 안성맞춤일 것 같은 풍경. 자귀나무의 잎은 쌍으로 나란히 달리는 깃꼴겹잎이고 해가 지면 수면(睡眠) 운동을 한다. 잎맥을 축으로 좌우의 잎들이 한 짝의 고무신처럼 서로 들러붙는 것이다. 해서 금실 좋은 부부를 상징하는 나무. 진작 느낀 것인데 가게에는 사내라곤 아무도 없었다. 총명한 아이들과 따뜻한 빵, 무엇보다도 이 상냥한 아내를 두고 대관절 남편은 어디로 갔을까. 밤이면 자귀나무 잎들도 짝을 찾아 포개지는데! 콩과의 낙엽교목.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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