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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 ‘손톱 밑 가시, 암 덩어리’에서 이제는 ‘붉은 깃발법’이 등장했다. 규제를 이르는 전·현직 대통령의 화법이다.

규제완화가 또다시 화두다. 규제를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낙인찍었다. 국가경쟁력을 갉아먹으면서 신성장 산업과 일자리 창출 등 혁신성장의 발목을 잡는 해악으로 여겨지고 있다. 규제완화의 부작용은 감춰둔 채 기업은 물론 보수언론과 정부·여당도 규제완화의 깃발 아래 한 몸처럼 움직인다. 규제가 왜 생겼는지, 왜 존속하고 있었는지, 규제를 없애면 어떤 부정적 효과가 있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규제 때문에 일자리가 창출되지 못하고 경제성장이 뒤처진다고 보는 것이다. 자동차 속도를 마차 속도에 맞추려고 붉은 깃발을 들라는 법이 없었더라면 자동차의 속도에 감이 없었던 시민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허둥대며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자동차 산업의 선두였던 영국이 독일에 자리를 내주었다고 규제를 탓하고 있다.

왜 일자리 숫자와 경제지표에 급급하나. 지지율이 조금 떨어졌다고 조급해하는가. 경기가 둔화되고 각종 지표가 나빠지자 재벌에 기대던 과거 정부의 악습을 답습하고 있는 듯하다. 몰래 만나 주고받던 지난 정권과 다르다면 공개적 만남이라는 것과 금전이 오고 가지 않았다는 것일 뿐 재벌에 대한 특혜이자 특정 기업 봐주기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투자와 고용을 압박하는 수법은 이전 정부 판박이다. 하라는 재벌개혁은 제쳐 두고 재벌에 구애하는 모습만 드러내고 있다. 역시 권력을 잡고 보니 먹고사는 것이 제일이던가. 개혁하라고 쥐여준 권력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경제를 외치는 언론과 재벌에 끌려가고 있다.   

지금의 지지율 50%대가 정상이다. 공약이행과 개혁에 대한 기대가 반영된 집권 초반의 70%대에서 한참 빠졌다고 방향을 틀 일이 아니다. 오히려 초심 그대로 나가야 할 때다. 이제는 지지기반마저 이탈할지도 모른다. 아니 벌써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역대 최저 지지율은 은산분리 원칙 공약파기와 삼성 껴안기로 개벌개혁이 물 건너가는 것은 아닌지 불만을 느낀 진보 지지층의 거리두기다. 실망한 촛불시민이 하나둘 표심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집권 2년차다. 개혁을 마무리하고 공약을 실천해야 할 때다. 일자리와 혁신성장에 밀려 기업이 하자는 대로 하다보면 규제의 댐은 무너지고 지지층도 균열이 간다. 정부가 약점을 보이면서 기업에 매달리니 벌써 온갖 기업 민원이 쇄도한다. 고용과 투자를 늘리겠으니 대가를 달라고 청구서를 내밀기 시작한다. 경제부총리가 기업총수를 만난 날 미래먹거리인 바이오에 대한 투자와 혁신의 대가로 복제약가를 올려달라는 민원을 들이밀었다. 은산분리 완화는 규제파괴의 서막이다. 개인정보에 관한 규제와 원격의료를 포함한 의료 관련 규제, 규제샌드박스 5법, 규제프리존특별법, 서비스발전산업기본법 등 소위 붉은 깃발 리스트가 대기하고 있다. 찬반의 논란이 적지 않은 분야들인데 너무 성급하다. 혁신 친화적 경제환경을 조성하고 신산업을 육성하는 일은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조급함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그 산업이 가져올 영향도 있을 것이고 규제는 여러 이해당사자의 이익이 복잡하게 충돌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규제는 악이며 규제혁신은 성장과 먹거리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접근해서도 안된다. 규제만 풀면 혁신성장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규제는 국민의 안전·건강·보건 및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화학물질관리법’이나 일회용 플라스틱 컵 사용을 규제하는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그 예다. 기업에는 비용부담의 규제이지만 넘지 못할 규제의 벽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규제완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 세월호 참사, 여전히 높은 산업재해 사망률, 라돈 침대 사태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대참사는 거의 대부분 규제를 완화해준 정부나 국회의 책임이거나 있는 규제를 피해가려는 탈법적 기업운영의 탓이다. 참사로 인한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은 규제완화로 얻을 이익보다 훨씬 크다. 자본의 이익 앞에서 규제는 무력해지기 마련이지만 국민의 생명·안전과 직결된 규제는 경제논리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규제가 완화되어 기업 활동이 법률과 국민의 감시를 피해간다면 언제 참사의 위험이 현실화될지 모른다. 국민의 생명은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 국가가 생명보호의무를 뒷전으로 밀어두고 자본의 이익, 일자리, 성장 논리에 밀려 규제혁신에 드라이브를 걸면 경제지표도 끌어올리지 못한 채 지지층 이탈의 원심력만 커진다. 안전·건강·보건 및 환경에 관한 규제의 장벽이 견고해야 국정운영의 지지기반도 더 단단해질 것이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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