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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가 바뀌는 데 14년이 걸렸다. 대법원이 종교나 신념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드디어 응답한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병역법상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여 형사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오기까지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사법의 원초적 보수성 때문에 판례변경이 쉽지 않은 전례에 비추어보면 이제라도 사회 변화를 수용한 사법부의 결단은 박수받을 만하다.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호소하면서 인권의 새로운 지평을 연 판결이다. 이로써 그동안 형벌과 맞바꿔온 수많은 젊은이들이 양심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양심에 따르다가 전과자가 된 그들이지만 이제 양심을 지킨 자신을 대견해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판결을 계기로 다수와 다르다고 배제하고 차별할 것이 아니라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다원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임을 깊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형사처벌을 해선 안된다는 판결을 내린 후 소송의 당사자인 오승헌씨가 취재진에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 김창길 기자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법원 판결 이후에 논란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비논리적이고 모순적인 판결 비판과 합리성을 잃은 대체복무제 도입 논의가 그렇다. 군대 간 사람은 비양심적이냐는 비아냥거림이 대표적이다. 병역을 거부한 것이 양심이라면 병역의무를 다한 것은 비양심이냐는 비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대립구도 조작이다. 병역거부가 양심에 따른 결정이라는 의미인데, 의도적으로 ‘양심적’과 ‘비양심적’을 대칭시킨 것이다. 신성한 국방 의무 앞에 열외가 없고 누구나 평등해야 국가안보가 굳건히 세워질 것이라고 믿는 자들은 남북의 대치상황을 들먹이며 판결을 비난한다. 진영논리로 사법을 재단하기도 한다. 분노와 비판의 목소리를 과대 포장해 판결의 의미를 깎아내려는 언론도 문제다. 있는 그대로를 기사화하는 것이 언론의 할 일이라고 하더라도 대법원의 무죄판결에 비난일색인 것처럼 보도하는 것은 언론의 책무와는 거리가 멀다. 국민의 반응이 비논리적이고 반인권적이라면 일침을 가하는 것이 언론의 할 일 아닌가.  

대체복무제 도입 논의도 마찬가지다.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증가할 것이라거나 누가 나라를 지키나 등의 반응을 부각시키거나 양심을 판 병역기피의 불복종 사회가 초래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대체복무에 징벌성을 가하려는 기획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양심을 빙자한 병역기피로 보게 되면 양심을 파는 징병대상자를 막기 위해서 현역복무보다 훨씬 더 힘든 대체복무로 만들어야 할 정당성이 생긴다. 그래서 지뢰제거 작업이나 복무기간 2배, 3배가 합당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처벌로 둔갑하는 것이다. 징벌적 대체복무로 형벌이 대체되는 꼴이다. 그야말로 명칭사기다. 대체복무 논의에도 비논리가 끼어들고 있다. 정당한 사유 없이 양심을 파는 병역거부자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대체복무의 종류와 기간을 정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병역거부가 정당하다면 현역복무에 상응하는 대체복무를 부과하면 된다. 대체복무의 종류와 기간을 정하는데 정당하지 않은 병역거부를 상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함부로 양심을 파는 비양심적 징병대상자를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당한 병역거부자에게는 징벌이 된다. 마치 엄한 형벌을 부과해야 잠재적 범죄자들이 겁을 먹고 범죄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흡사하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형사처벌 여부 논란은 대법원의 사법적 판단으로 종결되었지만 대체복무제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체복무 논의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양심적 신념을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의 취지에 맞게 인권의 관점에서 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는 각자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줄 임무가 있다. 바로 양심의 자유가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하여 올바른 행동으로 인도하고 결정해주는 나침반인 양심을 지켜주어야 한다. 그들이 내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결정은 이제 법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그들이 이행해야 할 대체복무도 병역의무다. 따라서 징벌성을 띠어서는 안된다. 20대 젊은이들에게는 1~2개월도 황금 같은 시간이다. 할 일 많은 그 시기에 양심을 팔기에는 9개월도 너무 길다. 엄청난 불이익으로 느껴질 것이다. 현역 18개월의 1.5배인 대체복무 27개월도 현역복무를 상쇄하고도 넘친다. 정당한 병역거부자에게 정부안처럼 36개월 징벌적 대체복무를 부과하는 것으로 현역병이 느낄지도 모를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해 줄 것이 아니라 병영문화 혁신과 군 인권향상이 우선이어야 한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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