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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일이었다.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는 노르웨이의 서남부 해안도시 베르겐에서 수도 오슬로로 가는 기차 맨 앞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러곤 무려 7시간 동안이나 기차가 보여주는 창밖의 풍경을 담아 아무 편집 없이 ‘베르겐 기차 여행(Bergen Line)’이란 제목으로 내보냈다.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끝없이 이어지는 눈 덮인 풍경만 무료하게 계속 나오는 방송이었다. 그러다 기차가 터널을 지나갈 때면 화면이 아예 깜깜했고 열차가 멈추었을 때는 그대로 정지 화면뿐이었고.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시청률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 무료하기 짝이 없는 프로그램을 ‘슬로 TV’라 명명하며 너무나 좋아했다. 실제로 시청률이 15%나 나왔다. 그러한 인기에 힘입어 거대한 크루즈 배가 노르웨이 피오르 해안을 항해하는 장면을 장장 134시간 동안 찍어서 내보낼 만큼 배포들이 커졌고.

tvN 프로그램 <숲속의 작은 집>에서 소지섭이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를 읽고 있는 모습.

물론 전 세계가 놀랐다. ‘시끄러운 바보상자’라고만 생각했던 TV가 그렇게 모험적으로 무료하고, 용기 있게 명상적이며, 또한 역동적으로 예술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너도나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대단히 부러웠다. 그렇게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 ‘고요하게 무료한’ 슬로 TV 방송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또 기꺼이 시청자로서 일상의 공기인 듯 그것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노르웨이라는 나라가 가진 문화적인 성숙도와 풍토, 혹은 시민 정서 같은 것들이.

그런 면에서 나는 나영석 PD가 ‘심심한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한 tvN의 새로운 ‘예능 다큐’ <숲속의 작은 집>이 잘되길 바랐다. 전기와 수도, 가스마저 제한적인 ‘숲속의 작은 집’에서 소지섭과 박신혜가 각각의 실험자가 되어 ‘미니멀 라이프’를 체험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예능’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다큐’에 가까운 프로그램이라니, 나영석다운 발상이다. 심지어 나영석은 ‘자발적 고립 다큐멘터리’라는 부제까지 달아놓고 ‘관계’라는 예능의 가장 재미난 핵심 요소를 의도적으로 삭제해 버린 채 한 개인의 숲속 고립 생활에 집중한다.

그 덕에 모든 게 저절로 단순해진다. 박신혜나 소지섭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느라 식재료를 다듬거나 장작을 지피는 소소한 과정 하나하나에 모두 집중하게 되고 고즈넉한 제주의 풍광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 소리, 자연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귀 기울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시청률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제 아무리 나영석이고 ‘시청률 안 나와도 되는 프로그램’이어서 신경 안 쓴다지만 과연 그럴까? 4월6일 3%대로 출발한 시청률이 4월 말 2%대로 떨어졌다가 다시 5월 말 1%대로 떨어진 데에 혹시 다음과 같은 외부 요인이 작용한 건 아닐까?

1. <숲속의 작은 집>은 야채 자르는 소리,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 보글보글 음식 익는 소리, 삭 비운 밥그릇 소리, 바람에 스치는 나뭇가지 소리, 빗소리 등에 귀를 기울인다. 박신혜의 말대로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을 듣는 듯한 프로그램. 하지만 4월27일 전 세계는 배석자 없이 진행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도보다리 산책 모습을 생중계로 보며 두 정상의 말소리가 배제된 채 새소리와 바람 소리 등의 현장음만 담긴 ‘세기의 ASMR 영상’ 그 절정을 경험해 버렸다. 절정을 경험하니 나머지는 ‘이류’ 같고 ‘아류’ 같다. ‘숲속의 작은 집’ ASMR도 당연히 이전만큼 신선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물론이고.

2. 자연친화적인 자발적 고립 상태 속에서 자급자족하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극장에서 본 지 얼마 안됐다. 한국판은 물론 일본판마저 보고 나서 <숲속의 작은 집>을 보면 확실히 뭔가 덜 무르익은 느낌. 영화와 다른 예능의 한계가 확실히 느껴지기도 하고.

3. 혼자가 편하다는 사람들이 늘면서 혼밥, 혼술, 나홀로여행 등이 유행했지만 사람들은 원래 태생적으로 홀로 고립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버지니아 대학의 티머시 윌슨 연구팀은 2014년<사이언스>를 통해 사람들은 오랜 시간 홀로 생각에 빠질 바에야 차라리 전기충격을 택한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4. 칼 융에 따르면 고독은 ‘중년의 임무’다. 일과 가정 꾸리기로 나를 잃었던 중년들이 “새로운 중심이 ‘자기’가 될 타이밍, 자기로 살아가는 평화, 변화를 통한 치유”를 위해 나이 들수록 고독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얘기.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 소지섭과 박신혜가 너무 젊었는지도 모른다.

5. 자발적 고립이든 고독이든 자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 듯 시끄러운 세상을 향해 조용히 방문을 닫는 거다. 예컨대 이명박과 박근혜 시대라면 대박 쳤을 테마. 그런데 지금은 도도한 시대의 흐름이 그런 고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은 다 함께 평화와 상생을 꿈꾸며 다 함께 연결되고 싶은 때라 나는 오늘도 열심히 신문을 읽고 팟캐스트를 듣고 유튜브를 뒤적인다. 그런 시대를 산다는 것에 환희를 느끼며.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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