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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내가 살면서 이른바 ‘소확행’의 절정을 경험한 날은 2003년 4월1일 홍콩 출신 중국 배우 장국영이 투신 자살한 날과 정확히 일치한다. 장국영이 내 가족이나 친구도 아닌데 장국영을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하루종일 말할 수 없이 울적했고 또 겁나게 무기력했다. 뱃전에 파도가 부딪치는 것처럼 천국의 속삭임인 듯 느릿한 하와이안풍 기타 연주곡 ‘Maria Elena’가 멀리서부터 계속 들려왔고, 귓전에서는 맘보 춤을 추던 ‘아비’의 대사도 끊임없이 재생됐다.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죽음이 진정한 휴식인 양 유혹하는 <아비정전>의 명대사…. 그런데도 그날 밤 나는 친구들과 간장게장에 소주를 마시며 행복했고 게 등딱지에 밥을 비벼 먹으며 살아서 이런 것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했다. 그건 일종의 인생 경험이었다. 삶이 고되고 하찮게 여겨질 때마다 꺼내어 곱씹으며 다시금 살아갈 이유를 찾는 일생일대의 경험 말이다.

영화 <아비정전>의 한 장면.

혹시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인가? 하루키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 마시는 차갑게 얼린 맥주 한 잔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런가 하면 <랑겔한스 섬의 오후>라는 에세이에서는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으로 ‘소확행’을 표현하기도 했다.

처음엔 낯설었고 그다음에는 놀랐다.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소소한 행위인가 싶어서. 그러곤 진정 부러웠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런 사소한 것들을 발견하여 새삼 의미를 부여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하루키의 그 출중한 능력이…. 그런데 진정 다행이다. 사람들이 말하듯 부러우면 지는 게 아니다. 동경하는 순간 닮기 마련이다. 다행히 20년 전에 하루키 에세이를 끼고 살던 내게도 하루키의 소확행적 감수성이 전이됐고 그 이후로 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삶의 구석구석을 예찬하는 ‘자살불능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살불능자로서 내가 가장 애독하는 책은 하루키가 아니다. 세상의 그 많고 많은 훌륭한 저작물 중에서 단 한 권만 고를 수 있다 해도 주저 없이 고를 내 인생의 책. 삶을 증오해 끊임없이 자살의 유혹에 시달렸던 아이가 삶을 즐기는 철학자가 되어 아흔 살 넘도록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을 조목조목 들려주는 책,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다.

“행복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바로 자기집착이다. 자기집착은 쉽게 말해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집착은 여러 불행의 요소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것이 쓸데없는 걱정이다.”

“(자살할 생각을 품고 살던 내가 나이들수록 이렇게 삶을 즐기게 된 비결은) 무엇보다 나에 대한 집착을 줄였다는 데 있다. 특히나 나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 결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법을 배워나갔다.”

“여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여론의 횡포는 여론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여론의 횡포에 비해서 훨씬 난폭하다. (…) 정말로 여론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하나의 힘이자 행복의 원천이 된다.”

“자신의 목적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 그리고 자기 나름의 일의 방식에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면 그러한 모든 것들이 인간이 수행하는 전체 활동 중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세상에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전혀 영향받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잊기 쉽다.”

“자신이 맡은 일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 사람은 늘 극단주의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 극단주의적인 경향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의 삶과 우주 속의 인간의 위치에 대해서 폭넓게 이해하는 것이다.”

“어쨌든 좋은 삶, 행복한 삶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기보다 큰 어떤 것에 유대감을 느끼며 자신이 우주의 작은 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의 일부임을 깨닫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한 성원임을 자각하고, 우주가 베푸는 아름다운 광경과 기쁨을 누린다.”

이것이 자살불능자의 건강법으로 소개하고 싶은 러셀의 문장들이다. 다시금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던 한 정치인의 황망하고 비통한 죽음으로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픈 모두와 나누고 싶은 문장들이기도 하고.

“이 나라에서 결코 살고 싶지 않은 절망의 이명박근혜 시대에도 당신 때문에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존재는 우리에게 ‘기쁨’이었고 ‘위안’이었고 ‘소확행’이었습니다. 그런 당신을 위해서도 너무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유머를 아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편히 쉬시길.”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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