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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시애틀 공항에 와 있다. 목적지는 알래스카. 한국에서 출발하는 알래스카행 직항 노선이 없기 때문에 시애틀에서 10시간 정도 보내야만 하는 상황이다. 경유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곳이 잠 들기 싫을 만큼 매력적인 항구도시 시애틀이라는 사실은 예기치 않게 받은 ‘리본 달린 일요일의 선물상자’ 같은 느낌이다. 안타까운 점은 나의 모든 살아 있는 감각으로 시애틀이라는 도시를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 겨우 반나절밖에 없다는 것. 그렇다면, 과연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겠는가?

10년 전 이맘때 나는 그런 행복한 고민 속에서 시애틀을 대표하는 작은 항구에 가서 물고기 요리를 사 먹었고 관광객이 거의 없는 평범한 동네를 산책하며 ‘시애틀에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아주 조금 음미해 보았다.

짧지만 ‘나만의 시애틀’을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반나절이었다.

앗, 그런데 나만 좀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다른 일행들이 선택한 장소는 놀랍게도 스타벅스 1호점이었다! 나도 안다. 시애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앞에 문을 연 원두만을 판매하던 스타벅스가 커피 하나로 세계적인 주류 문화를 만들었고 그리하여 거대 기업이 되었다는 것. 하지만, So What? 기껏해야 그와 관련된 기념품 쪼가리 사는 데 돈을 더 내는 일밖에 없을 것 같은 스타벅스 1호점이 뭐라고, 그 귀한 시간에…. 나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강원도 강릉에 위치한 커피숍 테라로사의 로스팅실에서 로스팅을 끝낸 원두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랬던 내가 최근 강릉의 최고 명소로 자리 잡았다는 테라로사 1호점에 앉아서 이런 생각을 했다. ‘와~, 주말이면 인근에 교통 체증이 일고 관광버스 타고 온 관광객과 함께 줄을 서서 커피를 사는 카페라고 하더니, 과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와볼 만하구나. 무슨 커피 매장이 웅장한 느낌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네. 그것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국적인 도시에 있는….’

언제부터인가 물건이나 음식을 파는 일개 상점이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공간으로 업그레이드된 채 그 도시의 정체성과 문화를 이끄는 역할을 해왔다. 미술관처럼 의미있게 개조되고, 하나의 공연이나 전시인 듯 연출되는가 하면 체험이라는 설렘까지 갖게 하는 상점 그 이상의 제3의 공간들 말이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에서 쇤브룬성 다음 가는 관광명소로 자리 잡은 스와로브스키의 크리스털 월드나 자동차의 모든 걸 체험할 수 있는 VW 아우토슈타트, 뉴욕의 허드슨 호텔, 베니스의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더블린의 기네스 하우스 같은 곳들이다.

예컨대 테라로사도 바로 그런 곳인데 더욱더 놀라운 건 테라로사는 렌조 피아노나 안도 다다오 같은 유명한 건축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은행원 출신의 바리스타로 알려진 테라로사 김용덕 대표가 직접 설계부터 시공 감독까지 도맡아 해냈다는 것.

게다가 커피 콩 한 알 생산되지 않는 강릉이 느닷없이 ‘커피의 도시’로 재탄생한 것도 알고 보면 테라로사의 공이 크다. 2002년 강릉에 커피 볶는 공장을 먼저 시작한 이후 커피 생두를 로스팅해 팔며 바리스타 교육도 병행했는데 그곳 테라로사에서 배운 문하생들이 잇달아 카페를 창업하면서 강릉이 커피의 고장으로 변신했다고. 게다가 전국 10개 지점에서 일하는 직원 200명을 모두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아파트 등 사택을 제공하는가 하면 해외 연수 비용에 자녀 대학 학비 문제까지 해결해 주는 커피전문점이라니 스타벅스가 부럽지 않겠구나 싶다.

솔직히 말하면, 아니 김정은 스타일로 말하면 “스타벅스, 이제 안되갔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예전엔 로스팅한 원두 커피 자체가 특별한 고급 음료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조금도 그렇지 않다. 이제 모두들 집에서 저마다의 방식대로 원두 커피를 즐기고 있고 편의점에서 파는 1200원짜리 원두 커피가 제법 맛있어서 카페 갈 일이 점점 줄고 있다. 고속도로휴게소에서 어쩔 수 없이 할리스나 탐앤탐스 같은 매장에서 비싼 커피를 사야만 할 때가 오면 은근히 부아가 날 지경이다. 그러니까 학자금 대출이나 월세 걱정하는 젊은이들이 스타벅스 커피를 한 손에 쥐고 마치 명품 핸드백을 차고 다니는 기분을 느끼던 시대는 이제 확실히 끝났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그 정도 수준의 원두나 매장 인테리어 가지고는 가격 대비 가치를 못 느낄뿐더러 유행마저 지났다고 선언해도 좋을 지경이다.

그렇다. 이제 스타벅스의 시대는 가고 테라로사의 시대가 도래했다. 무엇보다 비싼 로열티를 내지 않아도 되는 토종브랜드라 반갑다. 더 반가운 건 ‘메이드 인 피렌체’처럼 ‘강릉’이라는 지역성으로 더 고급화할 줄 아는 세련된 자기 철학의 힘! 남의 힘 빌릴 거 없다. 남이 만들어 놓은 힘 있고 영향력 있는 거대한 무언가엔 기댈 필요 없다. 그냥 우리 스스로 만들면 된다. 테라로사의 발견에서 그것을 읽는다. 무엇보다 평화와 함께 올 남북의 거대한 경제협력 속에서 우리 모두 저마다의 ‘테라로사’를 일굴 수 있는 공정한 기회가 더 많은 지역성과 함께 더 자주 열릴 거라는 기대와 믿음. 그것에 건배!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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