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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그랬다. 직업상 조지 나카시마나 핀 율, 한스 웨그너 같은 나무 본연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디자이너 가구에 대해 줄줄이 꿰고 있는 남자들을 주로 만났지만 나는 실상 그들보다는 나무 그 자체에 대해 잘 아는 남자가 더 좋았다. 자신의 직업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그저 식물을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기회 닿는 대로 더 깊이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는 남자. 그 때문에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수다스러워지기도 하는 남자. 예컨대 격렬했던 오전 업무가 끝나고 동료들과 가벼운 산책 중에 모감주 나무 아래에 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남자.

“옛날에 고려사를 보면 사신이 조공을 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져간 물품들이 비단·한지 등인데 그럼 중국에서 거꾸로 답례로 오는 것 속에 모감주 몇 말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 아, 그건 화살나무입니다. 가시가 있지요? 이런 식의 방어 기제가 있는 것들은 대체로 다 잎이 맛있습니다. 동물들이 다 좋아하지요.”

훌륭한 관광자원 역할을 하고 있는 전남 장성군 서삼면의 편백나무 조림지.

청와대 참모진과 경내 산책을 즐기던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다. 오죽하면 애칭이 ‘식물 박사’일까? 그러고보니 나무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전문가를 두루 키우고, 이들에게만 방제 자격을 부여하자는 골자의 ‘나무의사’ 도입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그다. 또 지난 4월 남북의 두 정상이 함께 군사분계선에 65년 된 반송을 기념식수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는 또 얼마나 가슴 뭉클해했던가?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사람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로 시작하는 김용준의 책 <근원수필> 생각이 난다. 세상에는 그게 매화나무든 감나무든 꽃나무 한 그루를 위대한 예술작품 못지않게 귀히 여기며 감상하는 ‘근원수필’적 인간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그런 부류를 매우 한가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하는 책.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전자는 결코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 대통령이 한가한가? 그처럼 더 중대한 일을 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또 있는가? 아무리 바빠도, 기꺼이 시간을 쪼개어 우리 삶의 뿌리라든가 인류의 ‘근원’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만큼은 가진 사람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이런 생각도 든다. 혹시 세계가 극찬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유능함은 혹시 우리로서는 그 이름도 모를 식물들을 대하는 그의 지극한 태도와 관련 있지 않을까?

물론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남자, 문재인>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문변’은 야생화 보기를 좋아했는데, 야생화 산행의 안내를 맡으면 인권변호사 일도 바쁠 텐데 더 좋은 산행의 결과물을 위해 하루 전날 미리 답사를 했다고 한다. 전날 답사를 통해 코스는 적정한지, 어떤 꽃이 피었고 어떤 나무들이 있는지, 그리고 내려와서 쉴 만한 곳은 마땅한지를 꼼꼼히 살폈다는 것. 다음날 야생화 탐방자들이 대만족인 것은 물론이었다고.

또한 <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의 저자 최수연씨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그는 꽃들 사이에 돋아난 별로 이롭지 않은 풀도 그냥 보지 않는다. 이 녀석들은 꽃과 꽃 사이에서 자라며 저 꽃들과도 연대를 한다고.”

그게 ‘외교 천재’ 문재인이 일하는 방식이다. 자신이 조금 더 수고롭더라도 상대를 조금 더 알뜰하게 살펴서 우리 모두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연대하기. 특유의 그 섬세하고 성실한 지성으로. 진실되게 감동적인 준비성과 그만의 인간적 온기를 담아!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재인의 정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는 박정희도 녹화사업만큼은 잘했다. 박정희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1960년대부터 산림법을 제정해서 단계별로 사방조림(황폐한 산지에 나무를 심어 토양을 보존하고 지력을 유지) 운동을 열심히 전개한 덕분에 30년 만에 민둥산을 없앤 업적만큼은 높이 산다. 물론 그 또한 ‘산림의 성쇠가 국력의 성쇠와 비례한다’는 일념으로 국가 조림 사업에 앞장섰던 현신규 서울대 명예교수의 역할이 컸지만 여하튼 두 사람의 녹화사업은 미국이 놀랄 정도로 성공적이었고 둘 다 국립수목원 ‘숲의 명예전당’에 헌정돼 있다.

하지만 그사이, 한국과 미국의 ‘주적’으로 고립되어 연료난과 식량난, 경제난에 빠져 살아온 북한엔 민둥산이 많아졌다. 많아도 너무 많다. 북한의 전체 면적 중 숲이 차지하는 비율이 74%인데 그중 32%가 황폐해졌다고 한다.

다행히 남북협력 1호 사업으로 북한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산림협력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대북 제재를 적용받지 않는 비정치적이며 비군사적인 사업이기에 무엇보다 먼저 추진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산림 녹화사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인가? 아무리 짧아도 30년이 걸리는 일이다. 게다가 무려 49억그루의 나무를 새로 심어야 하는데 북한에 ‘땔감’이 없어서 “아침에 심으면 저녁에 사라진다”는 얘기가 있다는 말을 어젯밤 경향신문 기사에서 읽고 무척 가슴 아팠다.

‘금 모으기’ 운동 같은 걸 생각한다. 누군가 ‘북한 민둥산에 심을 어린나무 한 그루 보내기’ 모금 운동 같은 걸 벌여주면 49억그루가 의외로 금방 모아질 것 같다, 물론이다. 내 몫으로 10그루쯤은 감당할 수 있다. 문재인 보유국의 국민으로서 기꺼이 그러고 싶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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