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폭염이 심했던 지난 8월14일 85세의 제 어머니가 쓰러졌습니다. 하혈이 너무 심한 데다 쇼크까지 와서 119에 신고를 했습니다. 5분도 되지 않아 소방대원들이 달려왔고, 응급조치 후 어머니는 인근 병원의 응급실로 실려 갔습니다. 병원에서는 심장에 직접 수혈해야 한다며 동의해 달라고 했습니다. 너무 피를 쏟아서 위험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고요. 나중에 의사는 변비가 심해 딱딱해진 대장이 직장에 눌려 혈관이 터졌으며, 하혈이 심하니 머리로 피가 가지 못해 쇼크가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변비가 노인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아찔했습니다. 한낮에 이런 일이 벌어졌거나 응급조치가 시급하게 이뤄지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다행히 어머니는 열흘 만에 퇴원을 하셨고, 지금은 더욱 자신감을 갖고 살고 계십니다. 퇴원 일주일 뒤에 다시 병원에 간 어머니에게 의사가 “연세에 비해 건강”하다고 이야기한 덕분이지요. 저는 세금 내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골든아워>(흐름출판)는 중증외상 분야 외과 전문의인 이국종이 삶과 죽음의 경계나 다름없는 중증외상센터에서 단 한 생명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벌인 사투를 담은 책입니다. 그는 이 책의 말미에서 중증외상센터의 세계적인 표준을 한국에 심어보고 싶었지만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서 15년 넘게 쌓아온 일들이 사상누각”이었다고 말합니다.

사고로 “사지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져나간 환자에게 시간은 생명”이기에 환자는 사고 직후 한 시간 이내에 전문 의료진과 장비가 있는 병원에 도착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골든아워’입니다. 그러나 “금쪽같은 시간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거리는 구급차로 이송 가능하지만 먼 거리는 상황이 다르고, 가깝더라도 차가 막히는 러시아워가 되면 환자들은 길바닥에 묶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헬리콥터로 환자를 옮기는 시스템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2011년 아덴만 여명작전으로 부상당한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일과 2017년 총상을 입은 북한군 병사를 살려낸 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 일들을 계기로 중증외상센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던 평범한 사람들이 여론을 조성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2011년 석해균 선장이 복지부 캐비닛에 처박혔던 중증외상센터 정책을 끌어내더니, 북한군 병사가 죽어가던 중증외상 의료시스템을 건져낸 셈이었다.”

덕분에 보건복지부의 ‘닥터헬기’ 정책도 도입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 사회의 투명성 정도론 의료계나 정부 모두 이런 사업을 감당할 수 없다. 15년간 나는 그 사실만 확인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병원 측은 비행할 의료진 충원에 난색을 표했다. 나는 병원 측에 더 이상 새로운 헬리콥터 도입사업에 참여할 의향이 없음을 밝혔다. 언젠가부터 나는 보직교수들이 중증외상센터가 적자의 주범이자 병원 내 감염의 주범, 병원 구성원들이 불편하게 느끼는 헬리콥터 소음의 주범임을 지적할 때마다 해명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그러한 사안들이 불만이면 공식적으로 정리해달라 답변했을 뿐이다.”

병원의 적자 타령과 헬리콥터 소음을 싫어하는 민원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이 사업이 좌초되어야 할까요? 그는 “한국에서의 중증외상센터 사업은 침몰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단언합니다. “나는 미국에서 중증외상 의료시스템의 세계적 표준과 원칙을 배웠고, 런던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또한 일본의 외상외과 의사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중증외상 판 안쪽에서 뒹구는 나는 침몰을 또렷하게 알았다. 본질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중증외상 의료시스템 구축에 필요하다며 다들 자기 이권만을 관철시키려 할 뿐, 정작 중증외상센터가 무엇인지 해외에서 진정성 있게 공부하려는 이들조차 없었다.”

저는 이국종 교수가 어깨가 부서지고, 한쪽 눈이 실명할 정도로 일하고도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탄하고 있지만 그의 인생은 감히 성공한 인생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세계적 표준을 따라가는 ‘최상위 중증외상센터’의 진료기록을 만들어 남기는 일”을 충분히 해왔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두 권 합쳐 820쪽이나 되는 이 책을 펴냈습니다.

그는 <골든아워>를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사선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환자와 내 동료들의 치열한 서사다. 외상으로 고통받다 끝내 세상을 등진 환자들의 안타까운 상황과, 환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싸우다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냉혹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업(業)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각자가 선 자리를 어떻게든 개선해보려 발버둥 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흔적”이라고 했다.

맞습니다. 저는 충분히 동의합니다. 저는 이 책을 제가 속해 있는 출판업계에 빙의해 읽었습니다. “발버둥 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이나 여론을 의식해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일은 어느 분야에나 있게 마련입니다. 특히 인공지능까지 등장하는 마당에 교육시스템부터 달라져야 마땅합니다. 교육의 질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은 대학입시입니다. 그런데 대학입시마저 분명한 철학을 갖고 결정해 국민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조사로 결정해 아이들의 미래를 엉망진창으로, 미리 망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골든아워>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소설처럼 읽히며 우리를 한없이 아프게 하는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의료, 교육, 출판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할 것입니다. 제게는 이 책이 올해 최고의 책이었습니다. 감히 강추합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