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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은 심장질환으로 평생 해오던 목수 일을 못하게 되자 전문의 소견에 따라 정부 지원금을 받으려고 신청을 한다. 그러나 마치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공무원들의 대응으로 인해 끝없는 좌절에 부딪힌다. 그의 고군분투는 끝내 관료주의의 벽을 뚫지 못하고, 어쩌면 관료주의의 활약상(?)은 저리도 모든 나라가 똑같을까 싶어서 새삼 화가 날 지경이다. 주인공은 결국 인간이 자존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거나 같다고 하면서 자기는 지원금 대상자 명단에서 빼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고 나서 그가 한 다음 행동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관공서 건물을 나온 그가 벽에다 자신의 심정을 크게 쓰는 장면이다. 그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라는 말로 글을 시작한다. 그 순간 내게는 그 ‘I’라는 글자가 크게 다가왔다. 모양 자체가 힘이 넘친다. 든든한 느낌도 든다. 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습을 그 글자 하나로 다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저절로 주인공을 응원하는 심정이 되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 이미지

그러면서 문득 한글로 ‘나’라는 글자 역시 매우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질문도 떠올랐다. 왜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인가. 왜 나가 마도 아니고 바도 아니고 나일까? 일단 나는 열린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나를 발음할 때는 입이 크게 열린다. 밖으로 내뱉는 소리인 것이다. 반면에 너를 발음할 때는 나에 비해 입이 오므라진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처음 한글을 만드신 분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가나다라마바사… 등에서는 나라는 발음이 가장 맑게 들리고 발음하기도 가장 쉽다(물론 내 생각에 그렇다는 뜻이다). 아무튼 내 생각은 더 비약해 나라는 글자가 나인 이유는 그만큼 나에 대해서 세상에 밝고 당당하게 맞서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데까지 나갔다. ‘나’라는 글자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으며, 그것이 뜻하는 바는 내가 원하는 것을 알려야 하는 주체는 바로 나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언젠가 법적인 문제로 변호사의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의 문제는 분명 자기가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계약을 맺었는데도 변호사를 만나면 주눅이 들어서 하고 싶은 말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설마 그런 일로 병원을 찾을까 싶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임상에서는 많이 만나는 사례 중 하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에게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한다는 문제로 깊이 고민한다.

우리는 왜 그처럼 상대에게 당당하게 나를 주장하지 못할까? 첫 번째는 일종의 피해의식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이다. 상대의 기분을 나쁘게 하면 나에게 손해를 끼칠 것 같은, 즉 나를 싫어해서 내 문제를 제대로 봐주지 않거나 나에게 나쁘게 할 것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 때문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어릴 적부터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주위의 가르침 속에서 자라난다. 어릴 때 듣는 동화도 늘 우는 아이나 떼쓰는 아이는 호랑이가 잡아가고, 콩쥐나 신데렐라처럼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에게도 말없이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결말이 주어진다는 내용이 대부분 아니던가. 즉 애초부터 상대방에게 순응해야 한다는 무언의 가르침 속에서 어른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나를 주장하는 것이 어색할 수밖에 없다.

자기주장을 하기 어렵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다. 자기주장이 지나치면 저 혼자 잘난 척한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렇다고 계속해서 순응하자니 나라는 존재는 껍데기만 있는 것 같아 불편한 심정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간결하되 단호하게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영어의 ‘I’라는 글자나 한글의 ‘나’라는 글자가 간결하면서도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나를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양창순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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