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허겁지겁 닥친 문제만을 해결하면서 살다보니 결과만 중시하는 풍조가 뼛속에 배어왔다. 과거 결과만 좋으면 뒤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살아왔다. 전문가들이 했다고 하면 그냥 믿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대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 과정은 결과만큼 중요하다. 이제는 모든 분야에서 과정이 공개되어야 하고, 이용자, 시민, 당사자들이 점검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전문가가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책임지는 시대도 끝났다. 전문가들이 책임지고 만들어서 안전에 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스리마일 원자력발전소는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사고를 일으켰다. 10만명 이상이 도피를 해야 했고 그 이후 40년간 미국에서 원전이 더 지어지지 않았다.

모든 문제를 고려하고 상정하여, 그 어떤 위협에도 문제가 없다던 후쿠시마 원전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무력했다. 일본의 원전 전문가들이 모여서 ‘상정 밖’의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했을 때, 시간의 용서는 불필요했다. 수만명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수십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여 떠돌게 되었다. 이후 찰스 페로라는 미국의 조직심리학자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모든 상황에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고 했으며 전문가의 말을 모두 신뢰해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사고를 방지하고 안전을 담보해주는 것은 다양한 시민과 여러 직역의 사람들에 의한 집단지성, 이익에 대한 속임수 없는 투명한 공개와 전문가의 양심, 그리고 반복적인 의사소통 훈련과 점검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권에 관여되어 이미 부패와 연관된 원전마피아라고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 논의테이블에 오를 자격이 없다. 그들은 이미 안전을 짓밟고 사고를 일으킬 행동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스리마일 사고나 체르노빌 사고도 크나큰 실수가 참사를 빚어낸 것이 아니라 밸브 한 개의 방향이 잘못 설정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전문가의 작은 타협, 근무자의 사소한 실수를 제어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이런 과정의 공개와 공론화, 시민의 참여는 비단 원전만의 문제가 아니다. 원전이나 댐처럼 눈에 보이는 건축구조가 붕괴되는 참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행정을 통해 사회구조가 무너져내려 사람들의 주거, 생활반경, 사회환경의 변화가 급물살에 침수되는 일도 참사이다.

필자가 관련된 분야인 정신보건계에서 최근 개정된 정신보건법의 시행이 그 예이다. 환자의 인권, 정신보건 전달체계, 치료방식 및 병원 운영방식의 변화가 크게 일어날 개정안 내용이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공개, 공론화, 시뮬레이션, 시민의 참여에 모두 실패하였다. 지킨 것은 오직 법개정 기일 하나였다. 복지부 관료들의 임무와 자리는 지켰지만, 환자, 가족, 의사, 관련 전문가들의 안전은 지키지 못했다. 모두를 혼란이라는 물결 속에 빠뜨렸다. 법개정 이전에 있어야할 법개정의 철학과 의미, 공청회, 운영비전, 법 시행으로 얻어지는 성과에 대해서 그 누구도 뚜렷한 그림을 그려낼 수 없었다. 시행 이후 복지부의 업무 협조, 지침 공문, 협력 압박만 지속되고 있다. 이 법을 통해 편리함과 자부심, 사회적 발전과 진보를 체감하는 사람들은 일부에 국한되고 있다. 복지부 당사자는 시민 앞에서 숨어버렸고, 전화 속에서 가느다란 목소리로만 만날 수 있다. 그러면서 복지부는 관련 위탁기관이나 일선 보건소에 지시만 내리고 자신들이 시키지 않은 일은 하지도 말라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의 의사소통을 소위 문재인 정부하에서 저지르고 있다.

저서 <위험사회>의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에 따르면 가장 위험한 집단은 관료집단이고,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확인한 주요인사들도 모두 관료들이었다. 박근혜시대의 관료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현재 정신보건법의 시행에 큰 문제가 없다고 설마 공치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탈원화를 통한 한국 정신보건의 개혁, 이것 또한 수없는 공론과 토론, 시민과 전문가의 참여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유가 치료라는 바자리아의 외침은 법 개정시행의 압박 속에서 노이로제로 나온 외침이 아니다.

김현수 |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