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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에 피아노학원 원장 남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서울 시내 대형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다는 장로였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두 딸이 있어 집에 몇 대의 피아노를 두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식 학원이었다. 90이 넘은 노모와 원장이 늘 집에 있었는데, 그날은 남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자 괜찮다며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연습하는 게 불편해서 일어나려고 하자 자신이 가르쳐주겠다며 뒤에서 불쑥 껴안고 더듬기 전까지는 그랬다. 엄마는 울면서 돌아온 내게 아빠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다. 더 몹쓸 일 겪지 않고 도망쳐 나와 다행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과연 다행이었을까.

나는 내가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아무 일도 당한 적 없는 아이처럼 굴었다. 그날 학원에 입고 갔던 점퍼를 몰래 버리고, 그 집에서 끓이던 청국장 냄새를 지나가는 길에서라도 맡으면 구역질을 했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이해가 잘됐다. 그럴수록 나는 내 안에서 점점 나쁜 아이가 되어갔다. 직장에 다니면서 몇 번의 성추행을 더 경험했다. 자신을 아빠처럼 오빠처럼 대하라면서, 아빠이고 오빠라면 근친상간의 범주에 들어갈 짓을 다정과 격려로 포장하는 남자들이 권력을 잡은 나라에서 여자들은 성추행, 성희롱을 일상처럼 경험한다.

그러나 이 고백은 #METOO가 아니다. 나는 #METOO로 인해 이 고백을 시작하지 않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실시하는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는 2003년에 시작되었다. 지난해에는 문단성폭력을 비롯하여 예술계의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폭로가 SNS를 기반으로 쏟아졌다. 정부기관에서는 실태 조사를 위한 설문지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많은 예술단체들이 자체조사를 약속했고, 교육과 처벌을 다짐했다. 그 일이 불과 얼마 전인데, 마치 처음 있는 일인 것처럼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고백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던 즈음 나는 스스로 세상을 떠난 한 젊음의 부고를 들었다. 숨겨진 문단성폭력 피해자였다. 미투 운동이 벌어지기 전 SNS를 통해 쏟아졌던 여러 가지 문단성폭력 사례들은 극히 일부만 처벌받고, 대부분은 법적 심리를 다퉈보지도 못했으며, 해석의 여지가 많은 어떤 판례 때문에 ‘꽃뱀’이나 ‘자기망상’으로 도리어 비난받은 증언 피해자들도 있다. 

대부분의 권력형 범죄가 그러하듯 가해자들은 복원되고 피해자들은 다시 숨었다. 그런 상황에서 불거진 미투 운동에 대한 관심을 지켜보는 마음이 나는 매우 불안하다. 이제까지 국내에서 이루어진 많은 성폭력 사례와 고백과 증언에 대한 언급 없이 새로운 바람, 새로운 경향으로만 미투를 읽는 시선이 어쩐지 자신의 과오는 진작 알아서 용서해버린 가해자의 것과 닮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지난 연말 아픈 마음으로 힘들게 읽었던 책이 있다. <용서의 나라>(토르디스 엘바, 톰 스트레인저 저/권가비 역/책세상)라는 책이다.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두고 용서,라는 표현 때문에 분노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 또한 그런 이유로 선뜻 읽지 못했던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읽은 이 책은 용서하기에 대한 책이 아니라 용서받기에 대한 책이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제대로 용서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무엇을 어떻게 용서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용서가 피해자를 어떻게 복원시키고, 회복시키는지의 과정을 아프게 지켜보면서, 나는 가해자조차 제대로 지목하지 못한 이 땅의 피해자들을 떠올렸다. 억울과 수모라는 말로 스스로를 복원시킨 이들, 때로는 신의 이름으로 기꺼이 자신을 용서한 이들, 그리하여 다른 가해자를 조사 처벌하겠다고 시치미 떼고 나선 가해자까지 존재하는 이 나라에서 비로소 한번 더 관심 받는 미투는 삭제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고, 살아남아 그들의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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