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너무 무서워서 장독대 뒤에 숨었어요.”

검찰의 성폭력 사건 보도 이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장면이 있다. 10여년 전, 한 단체가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대회’라는 것을 열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앞자리에 섰다. 그녀는 초등학생 시절 동네 아저씨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도 뭔가 대단히 안 좋은 일이고 부모에게도 말하면 야단을 맞을 것 같았다. 너무나 무서웠던 그 어린 소녀는 뒷마당의 장독대로 기어들어가 한참 동안 부들부들 떨었다며 울먹였다. 여기저기 훌쩍이는 소리에 그녀는 자신의 말을 들어줘서 고맙고, 함께 울어줘서 곪은 상처가 일부 치유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의 성폭력 사건을 접하면서 분노가 치밀었지만 다른 한편 착잡했다.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검찰과 법무부가 나서고 대통령까지 강력지시를 내린 것은 이례적인 발빠른 대응이다. 그럼에도 씁쓸했던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마치 그런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없었던 일인 양 새삼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아서다.

오래전부터 여성들은 온갖 비난과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목소리를 내왔다. 최근 미투(#Me Too) 운동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적도 있지만, 장독대 뒤에서 울먹였던 소녀의 목소리처럼 가늘게 떨리는 작은 아우성도 있었다.

이전에 국가인권위에서 근무할 때 다뤘던 성희롱 사건 중 제법 많은 비율의 피해자가 소규모 영세사업장이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직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성은 달랑 한두 명이고 그 외는 모두 남자인 일터에서 그들은 성희롱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조직화된 대응이나 도움을 받기도 어렵고, 외롭게 목소리를 내도 귀 기울여 주는 이도 별로 없었다. 권리구제의 또 다른 사각지대가 우리 사회 도처에 숨어있는 것이다.

성폭력은 뿌리 깊은 성별권력체계에서 비롯된 성차별이자 권력의 문제다. 그런데 이번 사안을 보면서 성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 또한 차별적이고 또 다른 계층 및 권력체계가 작동하는 것 아닌가 싶어 마음 한편이 편치 않았다.

검찰의 성폭력 폭로 이후 불꽃처럼 번져가는 미투 운동은 피해자들이 강요돼 왔던 침묵을 깨고 생존자로, 주체자로 나섰다는 점에서 운동의 새로운 차원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염려스러운 점도 없지 않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는 여전하고 심지어 꽃뱀으로 몰아가는 작태 또한 드물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목격자와 주변 사람들이 함께하자는 ‘미퍼스트(# Me First)’ 운동이 제안되고, 2차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의 변화는 느리고, 피해자 개인이 감내해야 할 상처와 고통은 직접적이고 가혹하다.

야만적인 성폭력을 근절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시대의 핵심적인 과제가 되었다. 그 변화의 문을 열기 위해 마련되어야 할 첫 번째 대책은 권리구제 시스템의 정비다. 공공기관이든, 민간기업이든 대부분의 조직은 성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든 문제를 축소·은폐하려 한다. 이를 위해 피해자를 회유하거나 비방 또는 음해하는 것도 불사한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로 이어지며 문제를 확대재생산한다. 당장 발생한 크고 작은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외부 전문가를 활용해 조사와 상담, 징계방안을 마련토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검찰의 성추행 사건에서 보듯 위계적인 조직과 순환보직 같은 인사체계에 얽매인 내부조직원으로서는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시급한 과제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성희롱 예방교육의 전면적 개편이다. 지금처럼 30분~1시간 내에 성희롱의 종류 등만 반복해서 알려주는 성희롱 예방교육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엔 미흡하다. 성희롱 예방교육은 성폭력이 가부장제의 낡은 관습이며, 그 뿌리가 성차별과 여성혐오와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깨닫고 비판적 시각을 갖추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존엄한 존재이며 평등한 존재라는 기본적인 인식이 정착되지 못할 때 위계적인 권력 조직은 성폭력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다. 성희롱 예방교육은 젠더와 인권교육을 토대로 감수성을 키우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권력 갑질을 깨닫고 비판하는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선결되어야 할 것은 이번 사건에 대한 정확하고도 포괄적인 진실 규명이다. 그 결과는 검찰은 물론 이 정부에 대한 신뢰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정부와 민간 모두가 나서 촘촘하고 치밀한 대책을 내놓아야 할 때다. 8년의 침묵을 강제한 풍토, 장독대 뒤에서 숨죽이며 울먹여야 했던 참담한 상황은 이제 혁파되어야 한다.

<문경란 |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