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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판사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집행유예로 풀어준 항소심 판결을 공개 비판하고 나섰다. 김동진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이재용 판결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법관이 다른 법관의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평하는 것은 금기처럼 되어 있다. 김 부장판사는 2014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선거법 위반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를 향해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함)’라 비판했다가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받은 바도 있다. 그런 그가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게 된 사법 현실이 안타깝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이재용 삼성잔자 부회장이 5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경향신문 김창길 기자 cut@kyunghang.com

 

이 부회장 항소심 판결의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하려면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다. 우리는 시민의 눈높이에서 두 가지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다른 국정농단 사건 재판부들이 증거능력을 인정했던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 내용 대부분을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은 점이다. 지난해 12월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는 장시호씨 등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이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바 있다. 앞서 서울고법 형사10부도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 대한 항소심에서 ‘안종범 수첩’을 판단의 주요 근거로 활용했다. 다른 국정농단 사건 재판부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둘째, 이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는 뇌물액수를 깎고 깎아 36억원만 인정했다. 하지만 이 액수만으로도 집행유예 선고 사안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박채윤 와이제이콥스메디칼 대표는 안 전 수석 등에게 5900만원 상당의 금품을 제공한 혐의가 인정돼 징역 1년의 실형이 확정됐다. 장시호씨는 특검 수사에 협조했음에도 항소심에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이 부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선고는 양형의 형평성과 예측가능성 측면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이번 일을 계기로 사법권의 독립, 법관의 독립이 과연 무엇을 위한 가치인지 다시 새길 필요가 있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주권자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행사하듯 사법부도 마찬가지다. 법관의 독립은 주권자가 제대로 된 재판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일 뿐, 개별 판사 마음대로 재판을 좌지우지하라는 뜻이 아니다. 국정농단 사건의 수많은 피고인 가운데 박채윤·장시호·문형표씨 등은 감옥에 있고 이 부회장은 석방됐다. 과연 상식과 정의에 부합하는가. 모든 법관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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