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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에 한 문예지의 신인상 심사를 보았다. 응모작은 많지 않았다. 좋은 작품도 선뜻 눈에 띄지 않았다. 어떤 작품들은 문장의 기초부터 다시 공부해야 할 것 같았다. 어려운 단어도 아닌데 틀리게 사용한 경우도 있었다. 한 문단만 읽어도 수준이 가늠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서툴고 미흡한 작품일수록 더욱 천천히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었다. 읽어야 할 작품 수가 적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장편소설의 예심을 보게 되어 사과 상자로 일곱 상자는 족히 되는 분량의 소설이 집에 도착했을 때도 과연 저걸 다 읽을 수 있을까 겁이 났지만 결국 다 읽었다. 그때라고 모든 작품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고르기 힘든 비슷한 수준이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사람도 그렇고 사물도 그렇고 작품도 그렇고 좋고 빼어난 것은 흔하지 않다. 신인의 것이든 기성의 것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원고지 100장을 채운다는 것, 원고지 1000장을 채운다는 건 도깨비방망이로 금 만들 듯 맘만 먹으면 뚝딱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있는 이야기를 옮겨 적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1000장을 쓰고 버려야 100장의 소설이 나오고, 1만장을 쓰고 버려야 1000장의 소설이 나오는 건,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은 누구나 아는 법칙이다. 나는 그 시간과 노력을 소요한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그 예의는 단 하나, 그들의 수고를 끝까지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읽다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작품 같은데, 보석 같은 문장이 한두 문장쯤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런 문장을 만나는 순간이 나는 너무 좋다. 그런 문장은 마치 처음부터 끝까지 형편없는 삶은 없다는 증명 같기도 하고, 누구에게나 빛나는 한 가지는 있다는 외침 같기도 하다. 겨우 하나의 문장으로 당선의 기쁨을 누릴 수는 없는 법이니 그 문장의 주인을 내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문장을 만나면 혼자 인사를 한다. 괜찮아. 네가 있으니 다음도 있을 거야. 문단 내적으로 시끄러웠던 올해에는 한마디를 더 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성공보다는 실패를 많이 겪은 삶이기 때문일까. 성공한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에게, 당선자보다는 낙선자에게 늘 마음이 쓰인다.

누군가의 평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가장 가혹한 것은 평가의 정당성을 믿을 수 없을 상황일 것이다. 제대로 읽고나 평가하는 것일까. 이미 내정된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딛고 있는 출발선이 허상일지도 모른다고 믿는 이의 달리기는 얼마나 힘들고 두려운 것인가. 그런 가혹함을 겪었고, 지금도 수시로 겪고 있는 나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해 공정하고 싶었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마찬가지의 마음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자신에게 주어진 응모작들을 꼼꼼히 읽었다.

지난 2016년은 우리가 온 힘을 다해 달린 삶이 권력자의 사적 인연에 간단하게 휘둘린 허상이었음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상상불가의 국정농단 사태는 기회의 균등, 평가의 부당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지난 1년 문학의 이름은 그 어느 때보다 부끄럽고 참담했다. 연초에는 유명작가들의 표절 사건이 있었고, 연말에는 권력형 성폭력 문제가 곪아 터졌다.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드러난 블랙리스트는 그나마의 존엄도 훼손하였다. 문학이, 글을 쓴다는 것이, 글을 읽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시대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학을 향해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향하는 이가 없는 사회는 살아남지 못한다. 꿈꾸는 이들이 있는 한 문학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들의 꿈이 미몽이나 추문이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다.

올해도 새해 첫날 첫 신문에는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모습이 실렸다. 평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이들의 좌절감이 우선 크겠지만 당선된 이들에게도 문학은 녹록지 않은 미래다. 부디 건강하게 살아남으시라.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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