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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꾼이 도끼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면 산의 초입에 있는 나무가 신호를 보내어 순식간에 온 산의 나무들이 경계태세를 취한다고 한다. 어디 나무뿐이겠는가? 풀과 풀 속의 벌레, 그리고 숲속 모든 동물들에게도 비상이 걸린다. 나무꾼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산의 모든 구성분자들은 자신들의 통신수단을 통해 나무꾼이라는 외부 침입자의 동태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그가 단순 방문자인지, 혹은 무언가 탈취하러 왔는지, 아니면 아예 산속에 살러 왔는지. 나무꾼의 태도 여하에 따라 산의 접대방식도 달라진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우리가 낯선 동네를 방문했을 때를 생각하면 된다. 그 동네의 풍습과 주민들을 존중하고 잘 적응하면 환영받을 것이요 제멋대로 굴면 바로 쫓겨날 것이다.

산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은 이런 적응과정을 거쳐 산이라는 하나의 생태계를 일군 것이다. 우리는 ‘적응’이라는 말을 주체인 나를 주위 환경에 맞추는 수동적 의미로 이해하는데 생태계의 작동방식을 보면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생태계에서는 개체와 개체, 개체와 전체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개체를 초월하는 어떤 규정력에 의해 개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가 결정된다. 주체의 자유의사가 분명 있기는 하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자율조절장치에 의해 제약받고 있다. 수십만마리의 새들이 일정한 모양을 그리며 군무를 추는 모습을 보면 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새들 하나하나가 잘 소통하고 있고 전체를 아우르는 통제장치가 없으면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광경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런데 개체의 소통능력(관계성)과 개체 간의 자율조절능력이 생태계 유지의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개체의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같은 종끼리 소통과 협력이 잘되고 있더라도 예기치 않은 환경변화가 생기면 일순간에 몰살되곤 한다. 조류인플루엔자에 의해 가금류 3000만마리 가까이 살처분되고 있는 현실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개체의 다양성은 관계의 다양성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접근방법의 다양성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독한 바이러스가 창궐한다 해도 일부만 다칠 뿐 생태계 전체가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다. 태초에 단순한 화산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던 지구가 오늘날 이토록 풍부한 생태계를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종의 다양성 덕분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생태계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데 세 가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가 개체의 ‘다양성’이요, 둘째가 개체의 소통능력 또는 ‘관계성’이요, 셋째가 ‘자율조절능력’이다. 인간사회도 넓게 보면 자연 생태계의 일부분이므로 이 원칙이 적용된다. 이제 이 원칙을 가지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촛불혁명을 들여다보자. 촛불이 왜 혁명인가 하면, 생태계의 기본원리를 철저히 무시하는 방식으로 구축된 현대 한국 사회를 바닥에서부터 허물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지배자들은 급속한 근대화를 위해 전 국민을 국가라는 공장(회사)에 취업한 노동자로 전락시키고 획일적인 통제를 해왔다. 학교는 이러한 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한 교육기관이며 언론매체는 학교 밖의 사람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통제·감시하기 위해 군대와 경찰, 사법제도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했다. 촛불은 이러한 획일적 통제에 대한 개인의 반란이다. 개인의 독자성과 다양성은 이번 촛불혁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여기에는 운동권의 조직화된 권위나 사회 저명인사의 충고 따위도 전혀 힘을 못 쓴다. 10년 전만 해도 이런 집회에서 민주노총 대표가 발언을 하면 사람들이 열광하며 무언가 든든한 믿음을 가졌는데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그저 참가자 중 한 사람이 발언하는구나 하는 정도의 임팩트밖에 느낄 수 없었다.

두 번째로 이번 촛불은 다양한 관계성의 총화를 보여주고 있다. 조직도 자금도 없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손에 든 스마트폰이 그 주인공이다. 스마트폰에 연결되는 순간 개체는 바로 전체가 된다. 온라인을 통해 무수한 집단과 소모임이 만들어지고 세상에 떠도는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정보의 독점을 통한 지배와 통제가 무력해지는 순간이다.

세 번째로 촛불은 전체와 개체 사이의 자율조절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세계 유력 언론들도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듯이 이번 촛불혁명은 그 규모와 지속성에 비해 놀랄 정도로 평화적이다. 물론 이는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것이지만 촛불을 든 개개인이 끊임없이 전체와 소통하는 가운데 터득하고 받아들인 결론이기도 하다. 촛불 가운데에는 왕년의 유명한 과격분자들이 섞여 있었지만 그들조차 스스로 몸을 사려야 할 정도로 전체적인 분위기가 평화모드로 진행되고 있다. 집회 후 자발적으로 거리를 청소하는 것이나 집회를 좀 더 재미있고 활력 있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볼거리, 먹을거리를 각자 알아서 준비해 오는 것도 훌륭한 예다.

확실히, 지금 진행되고 있는 촛불혁명은 건강한 생태계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이것을 또 다른 생태계인 기존 정치권이 어떻게 받아들이며, 두 생태계가 어떻게 생산적으로 결합하는가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형태로 결합되건 위에 언급한 생태계의 기본원리들이 온전히 구현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촛불민심은 기존 정치권의 구태의연한 흡수 의도를 단호히 거부할 것이지만 정치권이 진정 새로운 한국을 만들고자 한다면 살아있는 생태계인 촛불혁명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 진심으로 고민해야 한다.

황대권 | 생명평화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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