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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이라고는 일주일에 하루 영어학원만 다니던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마저도 그만두기로 했다. 결심을 한 날 바로 수강 철회 신청을 하고 학원 교사에게 인사를 전하고 마지막으로 지난 몇 년 동안 아이의 등·하원 시 차량 탑승을 도왔던 보조 선생님께 연락을 했다. 혹여 아이가 학원에 등록하지 않은 사실을 전달받지 못해 헛걸음을 하실까봐 바뀐 사정을 알려드리고 그동안 감사했노라 문자를 드렸는데, 잠시 후 답장이 왔다. 공부 열심히 하는 예쁜 아이 데리고 다니면서 당신이 더 행복했다며, 잊지 않고 연락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몇 문장에 담긴 진심이 어찌나 따뜻하고 뭉클하던지 하마터면 차량선생님 때문에 재등록하러 갈 뻔했다. 

오래전에도 그런 날이 있었다. 네 살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을 그만두던 마지막 날, 쇼핑봉투 가득 담긴 자잘한 짐을 대신 들고 서운함 가득한 표정으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나온 건, 담임교사도 보조교사도 아닌 1년 동안 아이를 태우고 다녔던 유치원 버스 기사님이었다. 과장되게 웃고 친절하던 유치원 관계자들은 내가 재등록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더 이상 웃지 않았다. 한동안 이슈가 되었던 비리유치원의 전형 같은 곳이라 이미 나는 아무 미련도 없고, 그래서 떠나기로 했던 거였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에게 혼자 쇼핑백 여러 개의 짐을 들려 보내며 그런 내색을 보인다는 게 못마땅했다.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얼른 아이를 챙겨준 기사님 덕분에 그래도 그 시절의 어느 한 기억과는 따뜻하고 다정하게 이별할 수 있었다.   

그보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출산을 앞두고 거의 반강제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였다. 나는 그 회사에서 임신한 직장 여성이 겪을 수 있는 모멸은 거의 다 겪었다. 내가 퇴사를 결정한 다음에야 차례로 찾아와 사과를 하는 누구와도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직장인으로서 마지막 내 예의와 매너를 갖추기 위해 온갖 의례적인 인사에 최선을 다하던 어느 날 나는 내 책상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 한 장 때문에 몰래 울었다. 아침마다 음료를 배달해주던 아주머니의 편지였다. 날마다 종류를 바꿔달라고 부탁했는데, 임신부에게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특정 과일 음료만 넣지 않는 배려를 해주던 분이었다. 예쁜 아기 건강하게 낳으라는 축복이 담긴 쪽지. 짐작도 못했던 편지로 인해 나는 그 암울하고 이기적인 공간에 따뜻한 편지 한 장을 추억으로 남길 수 있었다.

그런 비슷한 기억의 가장 먼 끝에는 지금은 사라진 버스 승차보조원도 있다. 오래전 시내버스에 안내양이라는 이름의 승차보조원이 있던 시절, 멀미하는 열 살 남짓 어린 나를 안내양 전용의 접이의자에 앉혀놓고 하얀 손수건으로 부채를 쳐주던 그이의 이름은 기억 못하고, 그 먼 길을 가는 버스에 왜 나만 혼자 남아 있게 됐는지 그 이유만 어슴푸레 짐작할 뿐이지만, 그건 몹시 서글프고 무서운 이유였지만 안내양 언니의 하얗고 차분하고 다정한 미소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졸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음은 중앙으로 향하고, 욕망은 상단에서 춤을 추는데, 그러다 떨어지면 위로는 늘 내가 돌아보지 않던 자리에서 찾아온다. 일상에서 나랑 무관하다고 지나쳤던 사람들에게, 내가 그 자리를 떠날 때 내내 함께였다고 믿은 누구도 건네지 않는, 누구보다 따뜻한 인사를 받게 될 때마다 나는 부끄럽다. 그들을 보지 않았던 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들과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나도 모르게 부린 허세를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나도 옛날에는…”으로 시작하는 가난 인증 감상을 늘어놓는 것이 요즘 SNS의 유행이라는 농담을 듣고 웃었다. 영화를 못 보아서 그 속에 가난이 어떤 가난인지는 모르겠는데, 소설의 서사로, 산문의 주제로 줄곧 가난을 팔아먹은지라 마음 한편이 뜨끔하다. 동시에 ‘옛날에는…’이라고 다 지난 이야기처럼 말하는 나는, 그래서 지금 어디에 어떻게 서 있나 새삼 궁금해지는 것이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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