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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검찰은 직접수사권과 수사지휘권, 영장청구권, 기소권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막강한 권한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기소하지 않을 권리’다. 다른 권한은 행사할 때만 그 위력을 드러낸다. 기소하지 않을 권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검찰이 4일 발표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 수사 결과는 이를 유감없이 입증했다. 검찰은 이미 구속된 김 전 차관과 건설업자 윤중천씨만 재판에 넘겼을 뿐, 봐주기 수사·외압·유착 등의 의혹을 받고 있는 다른 전·현직 검사들에게는 모두 면죄부를 줬다. 과거 부실수사를 반성하고 바로잡으라 했더니 또 다른 부실수사로 덮은 꼴이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수사권고 관련 수사단(이하 수사단)은 김 전 차관을 윤씨와 다른 사업가로부터 1억7000만원 상당의 뇌물과 성접대를 받은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은 그러나 사건의 본류인 김 전 차관의 성범죄 의혹을 밝히는 데는 실패했다. 검찰은 김 전 차관에게 성접대를 제공한 윤씨를 여성 이모씨에 대한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하면서도, 함께 성관계를 맺은 김 전 차관은 공범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피해 여성 이씨가 김 전 차관에게 ‘폭행이나 협박에 의한 성관계’임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피해 여성 진술이 사실이라 해도, 김 전 차관과 윤씨의 유착관계에 비춰볼 때 여성이 강요받는다는 정황을 김 전 차관이 몰랐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6월5일 (출처:경향신문DB)

수사단은 2013~2014년 진행된 검경 수사가 부실했는지, 그 과정에 ‘박근혜 청와대’의 외압이 작용했는지도 규명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과거사위가 직권남용 혐의로 수사를 권고한 곽상도 전 청와대 민정수석(현 자유한국당 의원)과 이중희 전 민정비서관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최근 과거사위가 수사를 촉구한 한상대 전 검찰총장 등 ‘윤중천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에 대해서도 수사에 착수할 단서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과거 수사가 부실하지도, 외압이 작용하지도 않았다면 왜 6년이 지나고도 재판에 넘길 수 있는 김 전 차관을 증거가 흘러넘쳤을 당시에는 기소하지 못했는가. 수사단은 이 같은 질문에 어떻게 답할 텐가.

김학의 사건 재수사는 핵심 의혹 규명 없이 또다시 ‘제 식구 감싸기’로 끝나고 말았다. 모욕당하고 착취당한 여성들에게는 ‘지연된 정의’마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법관과 검사, 경무관급 이상 경찰에 대해 기소권을 갖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필요성을 검찰 스스로 입증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과거 잘못을 교정할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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