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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다 보면 한 번은 콩쿠르에 참여하게 된다. 큰 상을 받았다고 대단한 명예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기회가 되지도 않는다. 그래도 노력한 아이들에게는 분명히 성취감일 것이고, 우리나라에서 취미로 음악을 배우는 아이들이 어떤 형태로라도 무대에 선다는 경험을 가져보는 일이 쉽지는 않아서 그 경험만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아쉬움은 남는다. 일단 지불하는 비용이 적지 않고, 그 비용을 지불하고 하는 경험 치고는 시간이 너무 짧다. 대개의 콩쿠르 평가 연주는 1분을 넘기지 않는다. 길면 1분30초다. 평가는 전문가의 영역이니 내가 평가 시간의 타당함을 논할 수는 없다.

그런데 평가가 그런 방식이다 보니 1분30초까지만 연습하고 참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설마 그럴까 했는데, 어느 정도 이상의 성적을 거둔 참가자들이 모여서 전곡을 연주하는 우수연주자 연주회를 구경하다가 그 말을 이해했다. 콩쿠르에 참가했던 곡을 다시 연주하는 경우조차 대부분 그때 들은 곡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1분30초 그 이후가 전혀 다른 곡이었다고 해야 하나. 물론 곡 전체를 고른 수준으로 연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뒷부분을 마저 보일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런 연주회를 보면 궁금해진다. 짧게는 3분, 길게는 5분짜리의 곡에서 1분30초의 기량은 무엇을 의미할까. 끝내 보일 수 없는 나머지 시간의 노력에 대하여 아이가 묻는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설을 처음 배울 때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가 ‘첫 문장의 중요성’이다. 효과적이고 적절한 첫 문장이 소설의 흡인력을 높인다는 말일 텐데 이 말은 종종 어떤 소설이 좋은지 아닌지는 첫 문장만 봐도 알 수 있다는 말로 바뀌어 전달되기도 한다. 조금 더 극적으로는 공모전 심사에서는 소설의 첫 문장만 보고 당락을 결정한다는 말도 있다.

그렇지만 사실 첫 문장과 소설의 완성도는 무관하다. 시작은 창대하나 나중은 미약한 소설도 있고, 시작은 초라한데 결말에 울림이 있는 소설도 있고, 시작도 결말도 딱히 특색은 없으나 보석 같은 몇 개의 문장을 품고 있는 소설도 있다. 물론 그 어디에도 빛나는 대목 하나 없는 소설도 슬프지만 있다. 나는 심사를 맡게 되면 주어진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편이다. 기본도 안되어 있다 싶은 작품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계속 읽는다. 내 앞에 놓인 소설이 단지 소설이 아니라 그 소설을 쓴 사람의 삶으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 한 편을 기어이 끝낸 사람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 혹시 만날지도 모르는 어떤 빛나는 문장에 대한 기대 때문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빛나는 방점이 어디에 찍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잘 쓰인 작품을 읽는 일은 당연히 즐겁지만 전체적으로는 엉성하고 보잘것없는 글 속에 숨겨진 주옥같은 문장을 발견하는 일은 뭉클하다. 어떤 삶이든 소중한 무언가는 있고, 그러므로 어떤 삶도 함부로 생략하거나 건너뛰어서는 안된다는 내 믿음에 대한 방증 같아 나는 비효율적인 읽기를 멈출 수 없다. 

‘눈이 부시게’ 한 장면. 사진제공 JTBC

중요한 순간을 되돌리려다 25세에서 70 노인이 된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나는 그런 이유로 몹시 애정하며, 실은 슬퍼하며 보고 있다. 드라마 초반부에 25세의 빛나는 청춘이 돌연 노인이 된 설정이 마치 높은 실업률과 지독한 경쟁 속에서 이미 늙어버린 요즘 청춘에 대한 은유 같아 가슴 아프기도 했지만, 요즘은 청춘을 건너뛰고 늙어버린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생략된 삶’에 대해 생각한다.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몇 십년을 건너뛰어 나이를 먹은 주인공의 삶은 누가 봐도 생략되었지만,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꿈도 미래도 없이 표류하는 주변 인물들의 삶은 아무것도 생략되지 않은 온전한 삶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살아야 온전한 완성일까. 어쩌면 나도 이미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생략되며 살아온 삶은 아닐까 그런 슬픔이 드는 것이다.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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