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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Too) 폭로가 정치권으로 옮겨간 뒤, 미투를 둘러싼 정치공작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실현하기라도 하듯 사건 당사자들 간의 진실 공방이 뜨겁다. 시민들 사이에서도 폭로할 만한 미투와 그렇지 못한 미투가 있다는 ‘진짜 미투, 가짜 미투 가리기’류의 갑론을박이 포털의 댓글 공간과 사회관계망서비스를 달군다.

공개폭로를 한 피해자들에게는 악의적인 루머 유포나 혐오 표현, 신상 털기로 적극적인 2차 피해를 입히면서, 익명의 폭로자들에게는 “진실이라면 무엇이 두려운가, 얼굴 드러내고 증거 대고 말하라”고 실명 피해 입증을 압박한다.

어느새 피해자의 절대적인 고통의 무게에 대한 사회적 공감은 희석되고, 피해자도 아닌 사람들이 “미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단서를 앞세워 가해자 중에 단죄받아 마땅한 진짜 나쁜 남자와 어쩌다 실수한 남자의 등급을 서슴없이 가린다.

이 공방의 와중에서 슬며시 사라져버리는 질문이 있다.

남자들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몇몇 거물 성폭력 가해자가 본보기로 처벌받아 이 사회로부터 잠시라도 배제된다면, 미투는 승리한 것인가? 여성들이 성폭력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이 열리는가?

문제 제기는 피해자로부터 시작했지만, 그 해결점을 찾으려면 시선은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왜곡된 사회문화구조로 돌려야 한다.

가해자들이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자기정당화했던 밑바탕에는 세대를 넘어 전수되는 왜곡된 남성성이 있다.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의 문제점을 분석했던 ‘맨박스(manbox)’의 저자 토니 포터는 남자들 사이에서 “공개적으로 여성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간주된다”고 지적한다.

같은 반 여학생들의 외모와 체형을 놓고 품평하면서 성적 대상화의 재미를 공유하는 남학생들만의 카톡방에서 반론을 제기하는 남학생들은 ‘○선비’라는 조롱을 받으며 또래에서 소외된다. 남자답지 않다는 평가가 두려워 침묵했던 소년들은, 직장에서 벌어지는 성추행 문제를 못 본 척 넘어가는 방관자들로 성장한다. 남자들 사이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어서, 혹은 강해 보이기 위해서, 동창 선배나 직장 상사를 따라, 매매춘에도 나서게 된다. 여자를 때리거나 성폭행하지 않는 나름 선량한 남자들의 관성과 침묵은 나쁜 남자들이 “남들도 다 그러는 거 아니냐”며 자신들의 가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인 구조를 철옹성으로 쌓게 만든다.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은 피해자들에게 향할 것이 아니다. 형이나 남자 선배나 직장 상사나 동성의 친구, 이웃 남자의 성폭력에 왜 나는 저항하지 않았었는가라고 남자들이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왜곡된 남성성에 대해 되돌아보기보다는 ‘위험요소’인 여자들을 아예 차단하는 펜스룰을 들이대거나 “원래 남자들은 자연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진화론을 펴는 일부 중장년 남자들의 보수적 저항은 예견된 것이라 하더라도 청년세대 남성들의 남성성에 대한 혼돈은 미래를 위해 그 근원을 들여다봐야 할 일이다. 여성학자 배은경 교수(서울대)는 “의무병역을 해도 그 공을 사회가 자동적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어 가족을 부양하거나 애인에게 경제적 능력을 과시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인 상황에서 여성을 경쟁자인 동시에 성적인 상대로 생각해야 하는 청년 남성들은 스스로의 남성성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혼돈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그 혼돈은 일베의 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온·오프라인에서 여성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과 여성혐오로 나타나기도 한다.

미투는 일시적인 소란이 아니라 성차별적인 사회를 바꾸려는 거대한 흐름이다. ‘본성’으로 치부되어온 왜곡된 남성성에 대한 전면적인 질문과 해체, 재구성 없이 미투 이후의 세상이 법적 처벌 사례 몇 건으로 쉽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곡된 남성성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진지하게 질문하고 답을 찾을 때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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