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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반에 태어나 평생 경남·부산에서 산 아버지는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알았고 일상에서 간혹 일본어 단어를 썼다. 내 뇌리에도 남은 자부동, 히야시, 와리깡, 요오지 따위의 명사들은 그야말로 ‘일제의 잔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순화 운동 덕분인지 ‘잔재로서의 일본어’는 우리 언어생활에서 대부분 소멸했다.

오늘날 외국어를 무차별하게 섞어 쓰며 한국의 언어생활을 혼란하게 하고 한국어를 2등 언어로 격하하는 자들은 대개 친미파와 아메리카 유학 출신들이지 ‘친일파’는 아니다. 특히 교육받은 젊은 세대나 여성의 언어에서 식민지 잔재로서의 일본어 단어는 없다고 생각한다.(물론 모에, 오타쿠, 닝겐 같은 어휘들이 새로운 대중문화 교류나 언어유희의 결과로 조금 들어왔다.)

그럼에도 오늘날 잔존하는 일어 단어를 쓰는 사람들은 일용직 노동자, 조폭, 주정꾼 같은 남성 하위계층의 일부 장년 세대일 듯하다. 그들이 ‘노가다’ 현장이나 당구장·술집 같은 좀 특별하고 거친 공간에서 데모도, 신삥, 나라시, 맛세 같은 어휘를 쓰는 듯하다. 따라서 저 일어 단어들은 일종의 사회방언(social dialect)이 된 것이다. ‘겐세이’도 비슷하다. 일어 ‘견제(牽制)’의 원래 뉘앙스는 지워지고 깽판, 훼방, 막무가내, 몽니 등의 어의를 갖게 된 것이다.

삼일절 어간에 국회에서 일어난 ‘겐세이 소동’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자유한국당의 ‘친일 본색’을 표현하는 거라고 해석했다. 일리는 있겠지만 나는 그보다 오늘날 일부 수구·보수 세력의 정체성과 품격 문제를 생각해보았다. 필자에게 특히 겐세이 소동을 일으킨 이모 의원은 미스터리한 인물로 느껴진다. 아마도 곱게 자라 미국의 유수 대학원을 나오고 이 나라에서 가장 학벌과 교양이 높을 것 같은 지역을 대표하는 나이 지긋한 여성 의원이 어떻게 겐세이 같은 거친 언어를 쓰게 되었을까? (국어학자들의 관심을 촉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한국당 남자 의원들이 겐세이 소동을 오히려 즐기며 이 의원을 칭찬했다는 보도를 보고 사태가 이해가 됐다.

깽판을 즐기는 거친 하위적 남성성. 겐세이는 한국당과 국회의사당 주변의 사회방언이었던 것이다. 이는 한국당의 정체성과 전략에도 꼭 어울려 보인다. 막무가내식 몽니와 어떤 사안이건 일단 무조건 반대·폄하하고 훼방 놓는 정치 행태.

그 무책임은 일종의 데카당(퇴폐·허무)의 표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당 대표는 자기만의 용어법과 환상 속의 ‘좌파’, ‘주사파’를 설정하고는 연신 허공에 어퍼컷·잽을 날리고 만족해한다. 폭주하는 막말과 후안무치한 태도에는, 무지와 시대착오에 15% 정도의 지지율이나마 지켜 현상유지를 하겠다는 계산이 뒤섞인 것으로 보인다. 미래를 향한 비전이나 대안 따위 0.1도 없지만, 상대의 실수와 정치혐오에 기대겠다는 것이다. 드디어 북핵 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르는 절호의 기회가 왔지만, 그 대표는 ‘충동적 결정으로 성사된 것’이라며 전쟁 방지를 위한 그 모든 진지한 노력과 미국 등 우방마저 쉽게 폄하한다.

미투 운동에 대한 태도는 더 참담하다. ‘좌파들이 많이 걸렸으면 좋겠다’ 같은 언동은 세간의 지적대로 미투 운동의 의미 자체에는 아무 관심 없고,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고백이 경쟁 세력을 ‘차도살인’하는 정략의 도구가 되기를 바라는 흑심을 투명하게 표현한다. 피해자들의 아픈 말들이 온 나라를 당혹과 고통에 휩싸이게 했는데 그들만은 희희낙락한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과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도 못 느끼는 종류의 인격이다.

‘합리적 보수, 개혁적 보수’란 애당초 정치학 교과서에나 존재하는 판타지일 뿐일지 모르지만, 116명의 의원을 보유한 거대 정당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말놀음을 정치행위라 착각하는 이런 경우가 다른 데도 있는지 궁금하다.

이들은 미완성인 촛불의 시간과 현실정치의 시간 격차가 빚은 진정한 잔존물이다. 이명박·박근혜들과 함께 이미 몰락했는데, 오랜 관성 덕분에 연명한다. 극단의 진영정치에 기대어 있기에 멈추지도 못한다. 자기갱신의 노력이나 시대를 선도하고 대중을 설득하려는 진지한 노력 대신 오로지 겐세이로만 존속한다. 겐세이는 잔존하는 존재의 무의미의 표현이다.

이 사회를 휩쓰는 두 가지 큰 해일 앞에서, 기대와 고통의 교차를 통감하며 시민과 여성들은 ‘헬조선’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촛불에서 정권교체로, 미투로, 또 남북회담으로, 일상과 직장의 폭력과 그리고 창공 위로 가로놓인 군사분계선과 절멸의 위험을 바꾸고 제거하려 분투한다. 진짜 ‘보수’라면 겐세이를 중지하고 허심탄회하게 동참할 것이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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