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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각 사람들은 자신의 존경을 받을 만한 정부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바로 그것이 보다 나은 정부를 얻을 수 있는 길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소로 <시민의 불복종> 중에서)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이 조언이 떠오른 것은 집에 도착한 선거 공보를 마룻바닥에 죽 늘어놓고 보던 참이었다. 역대 최다라는 15명 대선후보의 얼굴을 훑으며 ‘만개한 민주주의’의 증거를 보는 것 같아 뿌듯했던 것은 잠시. 나는 어쩌면 이 후보들의 공약을 꼼꼼히 따져보기는커녕, 누구의 사진이 더 강렬하게 각인되는가라는 인상비평에 그치고 말지 모르겠다는 곤혹스러움이 슬그머니 머리를 쳐들었다. 정책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은 해 왔지만 정작 유권자로서의 의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피로감부터 몰려왔던 것이다.

‘왜 나는 정해져 있는 메뉴를 따져보고 고르는 역할만 해야 하는 것일까, 방향을 바꾸어서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정부 혹은 대통령의 자격조건이 무엇인지 내 마음의 원칙을 세울 수는 없는가’라는 생각을 하자, 대선 과정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들 중에서 내가 부지불식간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되짚어 보게 됐다. 그것은 선거의 바깥에 선 존재들의 목소리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집계한 이번 대선 유권자수는 총 4243만2413명.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82%다. 선거에 끼지 못하는 18% 가운데 만 열여덟 살인 아들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가운데 만 19세 이상을 선거연령으로 정한 유일한 나라가 한국. 그래서 “결혼도 할 수 있고, 군대도 갈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는데, 투표는 못하는 대한민국의 흔한 열여덟 살”이 된 아들의 푸념의 무게가 내 한 표에 얹힌다. 아들 세대의 미래를 가불해서 쓰는 선택은 하지 말자는 것이 내가 이번 대선에서 누구에게 표를 던지는가의 첫 번째 고려 조건이 될 것이다.

나는 개도 고양이도 기르지 않는다. 하지만 “말 못하는 동물들이 학대받지 않고 살게 되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삶도 더 나아진다”며 헌법에 ‘동물권 명시’를 요구하는 이들의 주장은 쉽게 지나쳐지지 않았다. 그것은 개, 고양이, 돼지, 소, 닭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던질 수 있는 한 표가 없기에 있어도 있지 않은 투명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이들에게 선거가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야말로, 우리 사회가 더 숨쉴 만한 곳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가를 가늠하게 해 주는 척도가 아닐까. 민주주의의 역사란 목소리를 빼앗긴 무수한 존재들에게 목소리를 되돌려주는 과정이었으니 말이다.

미국의 사회운동가인 파커 J 파머가 저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민주시민이 갖춰야 할 마음의 습관이라고 역설한 ‘뻔뻔스러움과 겸손함’에 대해서도 되새겨 보았다. 나에게 표출할 의견이 있고 그것을 발언할 권리가 있음을 아는 것이 뻔뻔스러움이라면, 내가 아는 진리가 언제나 부분적이고 전혀 진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함이다.

대선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확장된 의견의 광장에서 뻔뻔스러움과 겸손함을 내게도 남에게도 바란다. 5월10일 아침, 우리는 그 전날까지 누구를 지지했으며 어떤 결과를 받아들었든 누구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께 또 새로운 하루를 시작해야 할 테니까.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고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경할 수 있는 국가를 상상하는 즐거움”(소로 <시민의 불복종> 중에서)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번에도 상상으로 끝날 것임을 나는 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봄날의 대선을 미리 회의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지난 1월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생애 마지막에 다다른 ‘좋은 사회’에 대한 정의가 이런 것이었음을 떠올린다면….

“좋은 사회란 자신이 속한 사회가 결코 현재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그래야만 현재 상태로부터 개선과 발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바우만 <희망, 살아있는 자의 의무> 중에서)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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