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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의 눈은 역시 날카롭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른 국가들에 충격적인 경험이 될 것”이라는 그의 예측이 맞았다. 트럼프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비용 한국 부담 발언 얘기다. 미국인들의 좌절과 분노를 자극해 권력을 잡은 트럼프가 한국에만 예의를 차릴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트럼프와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던 프랑스 ‘르몽드’지의 경고가 떠오른다.

사드 비용 부담은 한·미 양국 군이 이미 정리한 바 있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부지는 한국이 제공하고 미국은 전개·운용비용을 부담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약정서도 작성했다. 트럼프는 이를 무시한 채 10억달러를 한국이 내라고 요구했다. 사드로 인해 심각한 국론 분열과 중국의 사드 보복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 한국의 처지는 도외시했다. 그는 한국이 대선을 치르고 있고, 사드가 주요 대선 이슈라는 점도 고려하지 않았다. 한·미 동맹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갑질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한국은 북핵 해결을 위한 제네바 기본합의 때도 ‘봉’ 노릇을 한 적이 있다. 북한에 건설해줄 경수로 공사비 70%를 한국이 부담키로 한 것이다. 미국은 북한에 제공한 중유값만 제공키로 해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이번 트럼프의 사드 비용 발언은 경제적 부담을 넘어 한·미 동맹의 근간을 뒤흔든다는 점에서 훨씬 더 심각한 문제다. 한·미관계를 미국이 결정하면 한국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상하관계로 보는 트럼프의 왜곡된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트럼프 사드 발언 사태의 요체는 한국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 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5월 2일 (출처: 경향신문DB)

한국 대선판은 요동치고 있다. 문재인과 홍준표는 표를 얻었고, 안철수는 잃었다. 하지만 당장 대선판의 유불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든 향후 4년 가까이 한국을 우습게 아는 ‘미스터 불확실성’ 트럼프와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더 중대한 ‘사태’이기 때문이다. 사드 발언 사태와 유사한 사태가 되풀이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한국의 보수는 시험에 들었다. 미국 추종과 북한 악마화를 ‘진짜 안보’로 여기는 가면이 벗겨진 것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의 전유물이던 안보 이슈가 진보의 공격 수단이 됐다. 대선후보 TV토론 안보 이슈의 공수 주체도 바뀌었다. 진보 후보가 공격적 질문을 던지고 보수 후보들은 방어에 진땀을 흘리고 있다. 사드에 찬성하면 안보 후보이고 반대하면 안보 우려 후보로 몰아가는 왜곡된 인식도 개선 조짐을 보였다. 사드 비용부담 발언이 한국 안보 현실을 성찰하는 거울을 볼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한반도 안보 환경은 사드라는 안개가 걷히면서 북핵 위협과 중국의 사드 보복, 안보 비용 대폭 증액을 요구하는 미국에 삼중 포위된 엄중한 형국이다.

보수는 변화하는 트럼프 정부의 대북 접근 방식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선제타격할 것처럼 하다가 대화와 대북지원을 검토하는 외적 변화만 쫓아가다가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스스로의 대북 접근 원칙과 북핵 해결방안 없이 오직 강력한 대북압박과 제재만을 되뇐 결과이기도 하다. 자체적인 철학과 방안이 없으면 새로운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어렵게 된다.

사드와 미국을 맹신해온 보수의 구태의연한 안보관에도 책임이 있다. 미국이 하는 일이라면 순도 100%의 무오류인 것처럼 떠받들다 보니 정작 명백한 잘못이 드러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사드만 해도 각국의 손익계산서는 대충 나와 있다. 미국은 북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주한미군 보호, 괌 방어, 중국 견제, 미사일방어(MD)망 한반도로 확대, 북핵 견제 등 엄청난 군사적·전략적 이익을 얻는다. 중국도 대미 협상력 증대, 한국 경제보복을 빙자한 자국 기업 보호, 군비증강 명분 축적이란 이익을 거두고 있다. 북한 역시 북핵개발 명분 강화와 미·중갈등으로 인한 전략적 편익이 상당하다. 오직 한국만 이익은 없고 남북관계 악화, 국내 갈등 심화, 중국 보복조처 등을 감수해야 할 처지다. 정부에 묻고 싶다. 사드로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것은 미국이다. 여기에 사드 비용까지 한국에 전가하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사드 때문에 미국이 손해를 보고 한국은 이익을 본다는 트럼프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수와 정부의 의무 아닌가.

사드가 공격한 것은 한국의 보수였다. 이 점을 보수는 아프게 깨달아야 한다. 미국 뒤에 숨어 구호만 외치는 ‘가짜 안보’가 아니라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진짜 안보’가 필요하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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