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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씨. 새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되어갑니다. 잘 지내고 있는지요? 로스쿨의 1년차는 고 3 수험생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한 경쟁의 나날이라고 들었습니다. 봄이 오는 기운이라도 느낄 수 있어야 할 텐데요. 2월의 마지막 주, 학부를 졸업하며 J씨가 제게 작별인사로 건네준 편지에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딱히 답을 바라고 준 편지가 아닌 것을 알지만, 설령 답을 바라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저는 답장을 못했을 거예요.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마주할 때면 저는 자주 막막해지곤 했습니다. J씨가 편지에 쓴 대로, “사심 없는 친절은 멸종위기에 처해버린 세상”에서 학생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장벽들에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답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장벽들이 만들어지기까지 기성세대인 나와 내 친구들이 어디서부터 어긋나 버린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가 바랐던 것은 ‘더 나은 세상’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현재의 한국 사회를 진보와 보수 어떤 시각으로 평가하든, ‘청년이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역설에 망연해졌던 겁니다.  

저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에 다닌 이른바 ‘86세대’입니다. 지금 J씨 또래가 강고한 기득권 세력이라고 여길 우리이지만, 30여년 전에는 우리 자신이 지금의 모습이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일본인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가 얘기했듯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인 것입니다.

지금도 저의 친구들 대다수는 ‘기득권 세력’이라고 불리는 일에 강하게 반발합니다. 비슷한 나이대라고 해서 살아가는 모습이 제각각인 사람들을 싸잡아 ‘기득권’이라고 호명하는 일은 마치 요즘의 20대 앞에 유행처럼, ‘분노한’이라는 형용사를 갖다 붙이는 일만큼이나 게으른 인식일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우리 세대는 기득권의 속성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모든 기득권은 스스로 흔들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 고인 물 같은 편안함을 흔드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입니다. J씨들의 질문에 맞닥뜨리는 일은 그래서 당혹스러우면서도, 소중한 일입니다. 정치적 민주화 하나로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의 해결책을 환원해버리고 말았던 우리 세대의 감수성과 달리, J씨 또래는 세밀하게 분노합니다. 하나로 집결되지 않는 그 질문들은 서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한쪽에서 물뽕(GHB)이라는 약물을 써서 여성들을 성폭력한 세태를 규탄하면서 “정부는 방관했고, 경찰은 유착했으며, 남성들은 연대했다”고 외치면, 다른 쪽에서는 가해자들과 생물학적 성이 같다고 공범 취급 당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맞섭니다. 그러나 저는 때로 강의실에서조차 팽팽했던 그 긴장들이 편가르기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속속들이 스며있는 폭력에 대한 섬세한 인식에서 출발해 공정함과 책임분담, 연대의 균형점을 찾는 것으로 서서히 옮겨갈 것이라고 봅니다. 

J씨와 또래들의 질문이 다양하고 집요하고 예민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그만큼의 분량으로 조금씩 달라져갈 겁니다. J씨가 폐지 줍는 할머니와 동행해 쌀쌀한 초봄의 밤을 꼬박 새운 뒤 과제를 제출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할머니가 힘겹게 수레를 끌며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했던 말을 J씨는 인용했습니다. “뒤에서 손만 대고 있어줘도 오르막길이 훨씬 수월하다”고…. 그런 J씨에게 어떤 법조인이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정의나 공익이라는 말을 섣불리 앞세우지 않은 것이 저는 미더웠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J씨가 앞으로 생의 수많은 교차로에서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는 누군가를 말없이 밀어주는 손길이 되는 선택을 하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문화혁명의 격동기를 살아내며 배신과 자기부정, 우정, 사랑을 발견했던 중국의 작가 다이 호우잉은 자전적인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에 이런 구절을 남겼습니다. “함께 배웠다 하여 끝까지 같은 길을 걷는 것도 아니며, 길이 다르다 하여 반드시 다른 목적지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서로가 선 자리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건강을 빕니다.

<정은령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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